부모가 자녀 이름으로 몰래 받은 대출을 성인이 된 자녀가 갚도록 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왔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지난달 25일 옛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18조 1항 2호에 대한 강 모 씨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기각했다.
이번 헌법소원 심판 청구는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부모가 과거 자신들의 명의로 몰래 대출받은 4450만 원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은 강씨 형제가 냈다.
강씨 부친은 1996년 7월 교통사고로 중증후유장애를 앓게 됐다. 그는 2000년 3월 강씨 형제 명의로 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생활자금 대출 총 4450만원을 받았다. 당시 강씨 형제 나이는 9세, 8세였다. 이들은 부친으로부터 자신의 명의로 대출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가 형제 모르게 받은 대출은 자동차손배법이 규정하는 무이자 생활자금 대출이다.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후유장애를 입은 사람의 미성년 자녀(유자녀)가 대상이다.
이렇게 빌린 생활자금은 자녀가 30세가 된 이후 나눠서 변제해야 한다.
강씨 형제는 “대출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위해 대출금이 사용된 적이 없다”며 2021년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헌재에 헌법소원 심판도 청구했다.
형제는 “자동차손배법이 중증 후유장애인 당사자와 65세 이상 고령의 피부양가족에게는 보조금을 주면서 유자녀의 생활비는 상환이 필요한 대출로 주는 것이 평등 원칙에 어긋날뿐더러 아동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으나, 헌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석·이영진·문형배·김형두·정형식 재판관은 “심판 대상 조항이 대출의 형태로 유자녀 양육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은 유자녀가 소득 활동을 할 수 있는 30세 이후에는 자금을 회수해 한정된 재원을 가급적 많은 유자녀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공단이 지원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대출 사실을 몰랐던 자녀에게서도 돈을 회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은애·김기영·이미선·정정미 재판관은 “국가가 생계가 어려운 아동의 불확실한 미래 소득을 담보로 대출사업을 하는 셈”이라며 위헌 의견을 냈다. 이들은 “국가 재정 여건이 한정돼 있다는 점만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공백을 정당화할 수 없다”며 “국가는 책임보험료의 징수율을 인상하거나 세금 등의 공적 자원을 투입하는 등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씨 형제는 헌재 기각 결정 이후에도 민사소송을 이어갈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