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로 도와줬더니”… 방위비분담금을 권리로 다루는 트럼프의 착각 [박수찬의 軍]

“공짜도 반복되면 권리가 되지요.” 사극 ‘정도전’에서 박영규(이인임 역)가 했던 대사다.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 호의를 베풀면 처음에는 고마워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를 당연히 여긴다. 나중에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며 화를 낸다. 인간관계나 비즈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미국 대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1일 위스콘신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미 관계에서도 이같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을 놓고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상당한 규모의 분담금을 지급하며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돕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커지는 고립주의 노선과 더불어 ‘트럼프 리스크’가 불거진다면 주한미군과 방위비 문제를 놓고 갈등이 생길 위험이 크다.

 

◆트럼프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과 관련해 “우리는 위험한 위치에 4만명(실제는 2만8500명)의 병력이 있다”며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왜 다른 누군가를 방어하느냐”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지금 아주 부유한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들은 매우 부유한 나라인데 왜 돈을 내고 싶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하면, 한국에 분담금 대폭 증액을 요구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기 시절 한국에서 50억 달러(약 6조9000억원)를 받지 못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짜뉴스’다. 한국은 미국에 주지 않아도 되는 돈을 동맹을 돕기 위한 ‘호의’ 차원에서 특별히 지원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1일 미시간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와 여건 등을 규정한 제도적 장치는 1966년 7월 한·미가 서명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이다. 

 

SOFA 제5조는 ‘미측은 한측에 부담을 과하지 아니하고 주한미군 유지에 따른 경비를 부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주한미군 유지비는 미국 정부의 몫인 셈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91년 이전까진 주둔 유지비는 물론 한국이 제공해야 할 시설까지 대부분 자국이 부담했다.

 

이같은 추세는 1991년부터 바뀌었다. 1980년대 미국 재정적자 확대와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미국은 주둔비 분담을 요구해왔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과 SOFA 5조에 대한 예외조항 성격을 지닌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1991년부터 2~5년 단위로 체결했다. 이를 통해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규모를 정해왔다.

 

현재 방위비분담금은 1조원을 넘어섰다.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방위비분담금은 1조1833억원에 달한다. 

 

주한미군이 고용한 한국인 인건비(5598억원), 숙소와 훈련장 등이 포함된 군사건설비(4368억원), 탄약저장과 정비 등을 다루는 군수지원비(1867억원)에 쓰인다.

 

미 육군 병사들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방위비분담금은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 중 일부에 불과하다. 정부지출이 직접적으로 수반되는 직접지원 항목에는 미군의 통신선과 연합 지휘통제체계(C4I) 사용비가 포함되어 있다. 

 

한미연합사 통신비용부담합의서와 이행협정서 등을 근거로 제공되는 사용비 적용대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한국전구 범세계연합정보교환체계(CENTRIXS-K)다.

 

CENTRIXS-K는 한미연합사를 중심으로 합참 및 각군의 연합, 합동작전을 지원하는 한·미 연합 C4I의 핵심이다.

 

카투사(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력도 직접지원에 포함된다.

 

카투사는 미8군에 보내진 한국 육군으로 주한미군에서 한미 연합 관련 임무를 수행한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합의로 탄생, 1000~2000명이 지원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카투사 지원인력에 대해 기본급과 피복비, 한국군지원단 운영 지원비용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평택 기지 주변도로정비와 평택 지역 지원, 주한미군 훈련과 공무집행으로 인한 재산피해와 인명 상해에 대한 배상 지원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방위비분담금을 포함한 직접지원 규모는 총 2조1000억원(2021년 기준)에 달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1일 위스콘신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정부지출은 없지만 주한미군에 재정·자원 절감효과를 가져다주는 간접지원도 있다.

 

주한미군에 무상 제공하는 공여토지에 대한 임대료 평가, 카투사 병력을 미군으로 채울 경우 미국이 추가로 부담할 비용, 한국군 훈련장과 사격장을 주한미군이 이용하는데 따른 지원비 등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세금과 공과금 감면 또는 면제 조치도 있다. 관세와 내국세, 지방세, 석유 수입 및 판매 관련 세금은 면제가 적용된다. 도로와 항만, 공항, 철도 이용료도 면제다.

 

상하수도료와 전기료, 가스사용료, 전화통신료는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이같은 간접지원 규모는 총 1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주한미군이 반환한 기지에 대해 지방자치단체가 토양오염정화를 실시하는 것과 반환된 공여구역 개발에 필요한 토지 매입금 일부 지원 등을 포함하면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제공되는 재정지원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한국은 동맹인 미국의 입장과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위해 SOFA 규정상 지급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국민 혈세를 들여 제공해왔다. 

 

그런데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빌려준 돈을 빨리 받으려는 대부업자처럼 행세하며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동맹에 대한 경시와 사업적 거래에 익숙한 그의 속성이 뒤얽힌 결과라는 해석이다.

 

1일 미시간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피켓을 든 채 유세를 듣고 있다. AFP연합뉴스

◆美 고립주의 확산…대책 마련해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주장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것은 국제정치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 기류에 원인이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1~7일 미국 성인 3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 바이든 대통령이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83%에 달했다. 

 

‘세계의 경찰’로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다른 나라에 개입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국제 문제에 개입하는 다자주의·공동안보에 익숙지 않은 나라다. 역사적으로는 고립주의·일방주의·미국 우선주의 외교 역사가 더 길다. 

 

자유 교역과 공동 안보로 구성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주도 국제 질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흔들리기 쉬운 체제다.

 

건국 초기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유럽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를 했다. 

 

1823년 ‘미국은 유럽에 간섭하지 않겠다. 유럽도 아메리카에 간섭하지 말라’는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열세였던 유럽에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유럽 열강들의 전쟁을 수수방관했다. 반면 비유럽권에는 일본 개항(1853),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처럼 힘을 앞세운 일방주의를 앞세웠다.

 

이같은 기조는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결정적 전환을 맞이한다.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 개의 큰 바다가 자국을 보호해주리라 믿고 고립주의 정책을 추구했던 미국은 본격적인 공동안보 체제에 발을 들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추축국과 싸웠다. 전후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미주기구(OAS) 등을 만들어 유럽과 중남미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한국, 일본, 필리핀 등과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공동안보 체제를 굳혔다.

 

주한미군과 한국군 장병들이 도심 테러를 가정한 훈련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역사가 짧은 체제는 쉽게 흔들리는 법.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면서 동맹국들과 공동안보를 유지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고립주의의 도전을 받았다. 작용-반작용 법칙처럼 해외 전쟁에 개입한 직후에는 국제 이슈에서 후퇴하곤 했다. 

 

베트남전쟁 직후 아시아에서 미군의 군사 개입을 축소한 닉슨 독트린이 등장했고, 1차 걸프전 직후 대선에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이 유행,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2000년대 아프간·이라크 전쟁에서도 고립주의가 강해졌다. 최근 거세지는 고립주의도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대선 출마 과정에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는 것도 미국 유권자 사이에 퍼진 기조와 무관치 않다. 대선 켐페인에서 표를 모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동맹 체제를 북한보다는 중국을 겨냥하도록 바꿀 것을 요구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의 대폭 증액을 압박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카드를 던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국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베트남전쟁의 여파에 직면했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시절엔 주한미군 2만명 철수가 이뤄졌다.

 

한·미 동맹이 흔들린다면, 한반도에서 중국과 북한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국제질서를 훼손하려 하는 것도 막기 어렵다. 

 

트럼프 리스크가 현실화할 것에 대비, 동맹국들간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가속화 등 독자적인 국방정책을 시행할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