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문화 적응해도 저임금·고용불안… 안정적 일자리 애탄다 [연중기획-소멸위기 대한민국, 미래전략 세우자]

갈길 먼 ‘결혼이주민’ 안정화 지원

韓서 결혼해 정착 2021년 기준 40만명
초기엔 한국어 등 문화적 어려움 직면
시간 흐르면 경제활동 제약 새 고충
자아실현·소속감 떨어져 정체성 혼란

36%가 근로 형태상 임시·일용근로자
정부 주도 단기 일자리 임시방편 불과
다문화가족 지원책도 1년 넘게 헛바퀴
“취업 연계 실질적 직업훈련 제공돼야”

“초창기에는 걱정이 별로 없었어요. 아이를 배부르게 먹이고 잘 키우자는 생각으로 으쌰으쌰 하며 살았죠.”

 

왕지연(49)씨는 태어난 중국을 떠나 한국 생활을 시작한 2002년을 “사소한 걱정을 하던 때”로 기억했다. ‘어디를 가도 말이 통하도록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정도가 당시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고 한다.

여성가족부의 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이 2월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결혼이주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22년이 지난 지금, 왕씨는 한국어로 완벽한 소통이 가능해졌지만, 오히려 “옛날보다 훨씬 불안해졌다”고 말했다. “부모의 역할이 더 무거워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춘기를 겪는 아이와 다툼이 늘었고, 사교육비를 충당할 수 없어 아이를 잘 교육하지 못한다는 무기력감마저 일었다.

 

빠르게 크는 아이를 보면서 노후가 두려워지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당시 다문화 교육 강사 일을 하던 그는 대면 활동이 중단되면서 일감이 끊겼다.

 

다행히 왕씨는 현재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판매 실적에 따라 돈을 받는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으로, 고정수익은 없다. 왕씨는 “한국에 살면서 ‘외국인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며 “한국에 오래 살면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한국 문화에 동화도 되는데, 문제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왕씨처럼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이들은 40만명(2021년 기준)에 육박한다.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을 의미하는 결혼이주민(결혼이민자)이 17만4632명, 결혼이민 후 귀화한 이들이 21만880명이다. 2000년대부터 늘어난 결혼이주민들이 한국 거주를 장기화하면서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었다.

 

세월이 지나며 결혼이주민들이 겪는 고충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착 초기에는 한국어 습득과 한국 문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왕씨처럼 경제활동 제약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한다. 정부는 통번역 등 결혼이주민의 특성을 살린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방침이지만, 정부 주도의 단기 일자리 제공이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직업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결혼이주민들의 목소리다.

여성의날인 3월8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사회복지지부 조합원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가족부 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이주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 생활 장기화…“일하고 싶다”

 

한국에서 결혼 이주가 본격화된 건 1992년 즈음이다. 당시 도시화 흐름 속에서 농촌에 사는 남성들의 혼인율이 하락하자 정부는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을 통해 국제결혼을 장려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 들어 인구감소의 위기를 느낀 지자체들이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해 결혼 이주가 급증했다.

 

결혼 이주가 활성화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한국에 장기 거주한 결혼이주민도 늘었다. 6일 여성가족부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15년 이상 장기 거주한 결혼이민자·귀화자 비율은 2015년 20.6%에서 2021년 39.9%로 훌쩍 뛰었다. 10년 이상 체류자는 68.5%에 달한다.

 

오랜 시간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 문화에 적응한 결혼이주민들은 경제활동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모습을 보인다. 5년 미만 거주자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8.0%에 불과하지만 거주 기간이 길어질수록 참가율이 급증해 15년 이상 거주자는 71.2%를 나타냈다.

 

일을 통해 경제적 소득을 얻는 동시에 자아실현을 하고, 소속감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박명숙 상지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결혼이주여성의 노동시장 진입과 직장이동의 어려움’ 논문에서 “결혼이주여성은 일을 통해 경제적 생활만족, 자신감과 자존감 회복, 폭넓은 자기 계발, 타국에서 경험하는 정체성 혼란을 회복하는 정체감 확립 등 다양한 의미를 발견한다”고 분석했다.

◆저임금·불안정 일자리 전전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결혼이주민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높지만, 대부분은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성에 시달린다. 근무형태를 보면 임시근로자와 일용근로자가 35.9%로 일반 국민(21.5%)의 수준을 크게 상회했다. 임금 수준도 절반(47.8%)이 150만∼250만원을 받고, 26.5%는 150만원 미만을 받고 있다. 5.3%는 임금이 없다.

 

열악한 일자리는 남편이나 자녀와의 갈등이 커지는 원인이 된다. 14년 전 베트남에서 한국에 온 A씨는 “최근 초등학교 6학년 딸과 갈등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A씨는 딸이 휴대전화로 채팅앱을 통해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됐다. 하지만 아이와 이런 문제에 대해 대화할 시간은 부족했다. 제조공장에서 온종일 일한 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9시.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피곤에 지쳐 잠들기 일쑤다.

 

이는 양육과 경제활동을 모두 감당하는 ‘여성’으로서 겪는 일반적인 고충이기도 하지만, 결혼이주민은 ‘이주민’이라는 정체성까지 겹쳐 어려움이 가중된다. 정승희 충북 이주여성상담소장은 “요즘은 대부분의 이주여성이 일을 하지만, 전문성을 요하는 양질의 일자리로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결혼이주민은 여성이 경험하는 통상적인 문제에 더해 이주민으로서의 문제도 겪는다”고 설명했다.

 

결혼이주민들의 결혼생활이 길어지면서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취약해질 확률이 더 높다. 결혼이주민이 아이를 낳아 꾸린 가정을 ‘다문화가족’이라고 부르는데, 다문화가족의 가구 구성을 보면 한부모가족이 10.9%를 차지한다. 이들 중 93.9%는 본인(결혼이주민)이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데, 경제활동과 아이 양육을 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실제 이들 한부모는 만 5세 이하의 자녀를 둔 경우엔 돌봄 공백, 만 6세 이상은 교육비 등 비용 부담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허오영숙 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결혼이주민이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거와 일자리가 보장돼야 하는데, 그동안의 정책은 결혼이주민을 전업주부로 상정해 한국의 남성 중심 가정에 적응하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혼이주민을 동등한 시민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여가부 “경제활동 지원” 현실은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발표한 ‘제4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에서 “결혼이민자(결혼이주민)의 정착주기와 가구 구성에 따라 다양해진 지원수요에 대응해 전 생애를 포괄하는 사각지대 없는 지원서비스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발표 후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행된 현황은 미미한 수준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올해부터 가족센터, 새일센터 등 직업훈련 기관이 취업 기초 소양 교육부터 직업훈련, 사후관리까지 할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한다”며 “결혼이민자가 이주배경을 강점으로 살릴 수 있는 이중언어 강사, 통·번역사 등의 과정과 지역 일자리 수요를 반영한 자동차 시트 제작 전문가, 역사문화 스토리텔러 등 과정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여가부는 올해 신규사업이라서 아직 지역 일자리 연계 성과는 없다며 가족센터의 통번역·이중언어 전문인력을 지난해 342명에서 올해 400명으로 확대한 점을 그나마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직업 연속성은 없다.

 

육수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결혼이민여성 대다수는 다문화 교육강사, 원어민 강사, 통번역사 등 제한된 직종에서 직업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들을 배려해 가족센터에서 일정 부분 일을 배분하는 형태에 가까워 고정적 수입원이 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가족센터에서 다문화 교육을 했던 왕지연씨도 “취지는 좋지만 단기적으로 몇년 일하는 방식으로는 노후를 대비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왕씨는 “센터에서 통번역·이중언어 인력으로 근무한 경험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해 다른 일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여가부가 제공하는 직업훈련도 수료 후 취직으로 연계되지 않아 문제”라면서 “기업 일선에 취직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