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면접도 싹쓸이”… 공기업 신입, 국립대 쏠림 심화 [심층기획-지역인재 채용의 명암]

8개 공공기관 채용 6년간 분석

합격자 절반 이상이 거점 국립대
“기관내 파벌·서비스 저하 등 우려”

도로公은 3명 중 1명 경북대 출신
지방대 고른 취업 기회 취지 무색
공공기관 “現 제도 맞춰 채용” 해명

전문가들 제도 탄력적 운영 제안
“지역 내 초·중·고교 졸업자 혜택
영·호남 등 채용 광역화도 필요”

공공인재로 성장… 특정大 선호 없어
프로그램 참여 기업 70% “재채용”

전남지역 한 공기업엔 전남대 출신들의 모임이 있다. 국립대인 해당 대학 출신 직원들이 가끔 만나 식사하는 일종의 친목 모임이다. 이 공기업에서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채용된 신입사원의 59%는 전남대 출신. 각 지방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이 해당 지역 대학 출신을 뽑도록 한 ‘공공기관 지역인재 의무채용제도’ 때문이다. 전남대 관계자는 “해당 공기업과 관련 있는 학과엔 지역인재 의무채용 제도를 염두에 두고 대구와 경북, 서울 등에 있던 학생이 이곳으로 입학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경북지역에 있는 한국도로공사는 지난해 9월 신입사원을 채용했는데, 지역인재 합격자 46명 중 15명이 국립대인 경북대 출신이었다.

 

국내 공공기관들이 채용하는 지역인재의 특정 국립대 쏠림현상은 지역 대학 졸업자에게만 응시토록 한 ‘지역인재 채용 규정’ 때문인 것으로 파악됐다. 수도권 쏠림현상을 줄이기 위해 만든 지역인재 의무채용제도가 다시 지방 국립대 ‘공기업맨’의 쏠림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역 태생 우수 인재 역차별 논란을 막고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지역인재 채용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8일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전국 혁신도시에 있는 공공기관 중 규모가 큰 8개 공공기관의 최근 6년간(2018∼2023년) 지역인재 전형 합격자 절반 이상이 지역 국립대학 출신인 것으로 분석됐다.



대표적인 곳이 부산 소재 한국자산관리공사다. 최근 6년간 지역인재로 입사한 신입사원 147명 중 86명이 부산대(58%) 출신이다. 부산지역 또 다른 국립대인 부경대는 32명(22%)으로 집계됐다. 지역인재로 채용된 신입사원 10명 중 8명이 지역 국립대 출신인 것이다.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은 6년간 지역인재로 뽑힌 신입사원 280명 가운데 74%(208명)가 전북대 출신으로, 지역거점 국립대 쏠림현상이 가장 두드러졌다. 경남 진주시 한국토지주택공사도 67%(283명 중 190명)가 경상국립대 출신이었다. 대구 동구에 있는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지역인재 전형으로 입사한 신입사원(211명) 가운데 52%(109명)가 경북대 졸업자였다. 입조처는 “지방 국립대 중심으로 출신대학이 획일화되는 문제는 기관 내 파벌형성, 공공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 국립대 쏠림현상을 두고, 취준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계명대 출신 20대 김모씨는 대구에 이전해 온 공사에 지원했다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다니던 직장까지 관두고 공사 채용을 위해 1년간 준비했지만, 결국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김씨는 “취업준비생들이 모인 사이트를 살펴보니 이번 합격자 대부분이 경북대 출신이었다”면서 “블라인드 면접이라고 하는데 얼굴에 학교가 붙여진 것도 아니고 경북대 출신만 쏙쏙 뽑히니 신기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대구대 출신 이모(30대)씨는 지역인재 채용과 관련해 반감을 드러냈다. 이씨는 “지방에 있는 취업준비생에게 골고루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겠지만, (지역인재 의무채용)제도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청년도 많을 것”이라며 “합격자를 보면 국립대와 같은 지방 거점대학이 대부분으로, 높은 합격 턱에 주변을 보면 애초에 이력서조차 내지 않는 친구도 많다”고 했다.

이처럼 지역 이전 공공기관에서 국립대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공공기관이 있는 지역 대학 졸업자만 지역인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이전한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모두 졸업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나왔다면 지역인재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현행 제도에 맞춰 채용하고 있다 보니 지역 국립대 출신들이 많이 합격하는 걸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계명대 관계자는 “지역 국립대로 쏠림이 심각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지역 상생과 국가 균형발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지역인재 채용을 도입한 제도인 만큼 보다 유연하고 세밀한 개선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고 전했다.

대학간 편차가 정착화돼 있는 상황에선 비교적 입학성적이 높은 국립대 출신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충청권 이전 공공기관 지역인재 취업률 향상방안 연구’의 심층면접 조사에서 한 대학교 채용지원센터 담당자는 “현 제도에서는 지역인재 의무채용제도로 효과를 보는 대학은 지역 내에서도 입학성적이 높은 대학이다. 그 대학에서 공공기관 신입사원 합격정원을 다 가져간다고 봐야 한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지역의 범위를 더 확대하거나 지역인재 대상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승엽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시·도 단위로 나뉘어 있는 걸 영남, 호남, 충청 등 대단위 광역으로 묶으면, 적어도 특정 대학의 독식은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를 작성한 정진도 입법조사관은 보고서에서 “기관의 특성, 정책 지향점에 따라 소재지역 대학 졸업뿐 아니라 중·고교 졸업, 초·중·고교 졸업과 같이 대상을 다양하게 설정하면 기관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일부 지역 이전 공공기관은 지역의 고교를 졸업한 뒤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재(유턴인재) 등으로 이전지역 인재 범위를 확대해 달라는 의견을 국토교통부 등에 건의하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윤소연 부연구위원은 “지역인재 범위를 현행 기준보다도 축소하는 것도 지역인재 의무채용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한 방법일 수 있다”면서 “해당 지역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으로 조정하면 공공기관 취업 후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일본 교토선 46개大 손잡고 ‘인턴십’ 운영

 

우리나라 대학 제도와 유사한 일본은 ‘공공인재 프로젝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인재를 키워 연고지에 정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컨소시엄교토’다. 일본에서 중위권 정도인 교토지역 국·공립대학과 사립대 등 46곳이 모여 만든 대학컨소시엄교토는 매년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함께하는 인턴십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단체로 참여하다 보니 개별 대학에 대한 기업들의 쏠림현상도 거의 없다.

 

취업 효과는 크다. 지난해 인턴십프로그램에 참여한 기업·공공기관 등 80곳 중 77.5%(62곳)가 올해도 이들 대학의 학생을 인턴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재채용 의사를 밝힌 기업은 2021년 71.4%, 2022년 70.4%이다. 참여기업 10곳 중 7곳 이상은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다.

 

대학컨소시엄교토가 프로그램을 마친 뒤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한 기업 관계자는 “대학생들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며 “기업 입장에서도 우수한 학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학생들의 만족도 역시 높다. 해당 장기프로젝트 코스로 사단법인 KOKIN에서 일한 오타니 가에데(大谷楓·리쓰메이칸대 산업사회학부)는 “관광, 지역활동, 마을 만들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실습처 직원과 동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들 대학이 만든 ‘지역공공정책사’도 청년들의 지역 정착에 도움이 되고 있다. 사립대인 류코쿠대(龍谷大), 리쓰메이칸대(立命館大) 등에는 공공정책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학부를 정규학사로 개설했다. 학생들이 이 학부에서 지역 기반 학습을 다루는 6개 과목을 수강하면 초급 지역공공정책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지역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프로그램을 수료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한 학생들을 우선 채용한다. 취업에 도움이 되다 보니 공공정책사 자격을 취득한 학생은 2015년 21명에서 2018년 92명, 2021년 107명으로 증가 추세다.

 

이 프로그램을 수료한 학생 대부분은 지역 내 지자체, 공공기관 전문직원, 시민운동가, 사회적경제기업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지역 내 여러 문제를 살피고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공공인재’로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각 지역의 사회적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학생 프로그램을 선정해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8일 “일본 대학들의 지역 밀착형 협치 실험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공공기관 지역인재 의무채용제’의 궁극적인 목표, 즉 지역 정착 인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