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맹주’ 이란의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자 국제사회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에 이은 사실상 2인자로 꼽혀 온 라이시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가자 전쟁 등으로 살얼음판을 걸어온 중동 정세가 다시 한 번 요동치는 등 파장이 예상된다. 이란에서 히잡 시위 및 경제난 등으로 민심 이반이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후계 구도 승계 과정에서 권력 투쟁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
라이시 대통령은 2021년 집권하며 이슬람 종파 분쟁을 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교를 재개하는 등 이슬람권 국가들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과는 적대 국면을 이어 갔다. 가자지구 전쟁이 지난해 10월 발발한 이후에는 동맹을 맺고 있는 하마스를 물밑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지난달 13일에는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이 피폭된 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하기도 했다.
히잡 시위 및 경제난 등을 겪고 있는 이란 국내 상황에도 혼란이 예상된다. 2022년 9월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금된 후 사망하자 이란 내부에선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란은 인플레이션, 미국 주도의 제재 등으로 경제 악화에 시달렸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제재로 지난 3월 이란의 통화 가치가 사상 최저로 떨어졌으며 인플레이션은 30%를 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에 수면 밑에서 끓어오르던 국민 분노가 강경 노선을 주도해 온 리더십 진공 상태를 계기로 분출, 혼란상이 가중되며 내부 권력 변화 등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은 이란 12명 부통령 중 가장 선임이자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측근으로 꼽히는 모하마드 모크베르에게 승계된다. 이란 최고지도자들의 ‘돈줄’ 역할을 해온 투자펀드 ‘세타드’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하기도 했던 모베르크 부통령은 새 대통령을 뽑기 위한 보궐선거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ISNA 통신 등 현지 매체는 “대선은 7월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외신들은 라이시 대통령이 36년째 집권 중인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에 이은 사실상의 2인자로, 그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돼 왔다는 점에서 그의 사망과 새 대통령 선출이 이란 정국에 미칠 파장은 상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외신들에 따르면 최고지도자 자리를 이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하메네이의 둘째 아들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최고지도자 후임을 결정하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성직자 상당수는 세습을 두고 이란 혁명 원칙에 어긋난다며 반대하고 있다. 또 갑작스럽게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고위관료들의 권력 경쟁으로 정치적 혼란이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코노미스트는 라이시 대통령의 유고에 따른 혼란이 “중차대한 권력 투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가능성이 현실화할 경우 이란이 국내적으로는 종교적 보수주의가 약화할 수 있지만, 대외 정책 면에서는 서방 등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분쟁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국장은 NYT에 “이 상황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처해 있고 역내에서 이스라엘 및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스라엘 일간지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란에선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의 권한 아래 대통령이 있기에 이번 사고가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전날 추락 사고 보도가 나오자 “이번 사고가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므로 이란 국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국정 혼란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