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문장가 박지원이 바라본 올바른 삶이란…

3차 전면 개정판 ‘조선의 양심, 연암 박지원 소설집’

‘허생’ 등 한문소설 세월 뛰어넘어 각광
18세 무렵 쓴 ‘광문자전’ 등 10편 수록
해석·문맥·오류 과감히 바로잡아 출간

조선시대 양반들의 타락·위선 고발
근대사회 예견하는 새 인간상 제시
파격적 주제·기발한 문체로 생동감

밥을 조금만 먹고 밤새 자지 않았다. 한낮이 되면 문득 벽에 기대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고 ‘용호교(낮잠)’를 취할 뿐이었다. 환갑을 넘긴 한 남성이 한양 근교에 위치한 절 봉원사에서 ‘도인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마 불교 수행법인 일종식과 장좌불와로 추정된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닌가. 허생 이야기를 비롯해 완흥군 부인, 변승업 이야기 등등.

그러니까 1756년 병자년 겨울, 스무 살 선비 박지원은 봉원사에 공부하러 갔다가 객으로 머물고 있던 윤영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허생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다시 18년의 세월이 흘러 1773년 봄, 박지원은 평안도 성천의 비류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다가 십이봉 아래 암자에서 80대 노인을 재회했다. 박지원은 이때 허생의 이야기 중 한두 가지 모순되는 점을 물었고, 노인은 곧 어제 일처럼 똑똑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해 줬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되는 연암 박지원의 모든 한문소설을 모두 모아서 번역 출간해 화제가 됐던 ‘연암 박지원 소설집’의 3차 전면 개정판이 최근 나왔다. 사진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박지원의 초상화. 세계일보 자료사진

연암은 1780년 청나라 진하사를 따라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처남 집을 오가면서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24년 만에 한문소설을 창작, ‘열하일기’의 ‘옥갑야화’편에 수록했다. 바로 “연암의 소설 중 가장 구상과 착상이 뛰어난 득의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소설 ‘허생’이었다.



소설은 연암 일행이 열하로 연행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옥갑에서 무관 비장들과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기록한 형식으로 풀어간다. 남다른 신의로 큰돈을 벌었던 역관 홍순언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이야기 끝에 ‘나’는 기인 윤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10년 계획으로 글공부를 하던 허생은 가난과 아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여 7년 만에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 변씨를 찾아가 1만냥을 빌린다. 안성에서 장사를 시작해 큰돈을 번 뒤 도둑들과 여성들을 이끌고 서남해의 외딴 섬으로 들어간다. 허생은 돈을 바다에 버리고 글을 아는 사람들을 이끌고 홀연히 뭍으로 나온 뒤 변씨에게 10만냥을 갚고 친구가 된다. 하루는 변씨의 소개로 어영대장 이완이 찾아오자 북벌의 묘책으로 세 가지 지혜를 냈지만, 이완이 모두 어렵다고 하자 이완을 쫓아낸 뒤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 양반들을 질타한 그의 목소리만 남기고.

“소위 사대부라는 것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하는 놈들이야!… 아, 번어기는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자신의 머리를 아까워하지 않았고, 무령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오랑캐 복장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대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한 줌밖에 안 되는 상투를 아껴! 지금 장차 말달리기, 검 찌르기, 창 찌르기, 활쏘기, 돌 던지기를 해야 되는데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도 않고서 제 딴에 이것을 예법이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세 가지 계책을 말해주었는데 너는 한 가지도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믿음직스러운 신하를 자처해! 믿음직한 신하가 정녕 이따위란 말이냐? 이런 놈은 목을 베어야 해!”

‘허생’을 비롯해 박지원의 한문소설들은 교과서 수록은 물론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2006년 박지원의 모든 한문소설을 모아 ‘연암 박지원 소설집’을 번역 출간했던 인하대 초빙교수이자 고전독작가 간호윤이 3차 전면 개정판 ‘조선의 양심, 연암 박지원 소설집’(소명출판)을 최근 펴냈다. 박지원의 소설은 그동안 주로 아동이나 청소년용으로 발간돼 왔고, 성인을 겨냥한 작품의 경우 대체로 낱권 또는 몇 개의 작품만 묶여 출간돼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간 교수는 “기존 개정판의 해석이나 문맥, 기타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소설집에는 연암이 18세 무렵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광문자전’을 비롯해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 ‘호질’, ‘허생’, ‘열녀함양박씨전 병서’까지 모두 10편이 수록돼 있고, 소실돼 구체적인 문장을 알 수 없는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의 경우 해설을 담았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이 소설로 형상화한 조선 사회와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박지원은 계급의 사슬 속에 갇힌 시대에 왜 소설을 써야 했을까. 소설집 작품을 통해서 박지원과 조선 사람들을 만난다.

연암이 18세 때 창작, ‘연암소설의 숫눈길을 열어젖힌 소설’로 평가되는 ‘광문자전’은 광문이라는 거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수표교 다리 밑의 거지 우두머리 광문은 한 아이가 죽으면서 살해범으로 내몰리고 마을로 쫓겨 갔다가 도둑으로 몰린다. 집주인의 선처로 풀려난 광문은 죽은 아이의 시체를 장사지내주고 이를 지켜본 집주인의 추천으로 약방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약방에서 돈이 사라지면서 광문은 다시 도둑으로 의심받지만, 약방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져간 것이 드러나면서 모두의 칭송을 받는다. 심지어 장안에서 이름난 기생 운심조차 사대부의 요청에는 반응하지 않다가 광문이 들어서자 혼연히 일어나 춤을 추는데.

중국 점포에 기록된 기문을 가필한 것으로 알려진 ‘호질’은 연암이 1780년 북경 사절단에 동행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열하일기’의 ‘관내정사’편에 수록한 우언 소설이다. 연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원숙하고 필력이 집결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느 날 대호(大虎)가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불결하게 느껴진다며 청렴한 선비 고기를 먹기로 한다. 이때 북곽 선생이라는 선비는 동리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한다. 선비는 동리자의 아들들에 쫓겨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분뇨구덩이에 빠진다. 구덩이에서 겨우 기어나오자 대호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양반들의 무능과 위선, 아첨을 비판한다.

“가까이 오지 마라! 저번에 들으니 ‘선비 유’란 ‘아첨할 유’라 하더니 정말이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나쁜 이름은 모조리 모아서 망령되이 내게 덧씌우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믿겠느냐. 무릇 천하의 이치는 하나뿐이다. 범이 참으로 악하다면 인간의 성품 또한 악한 것이고, 인간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 또한 착할 것이다.”(218쪽)

소설집을 번역 출간한 간 교수는 “12편의 작품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양반들에게서 부조리를 찾고 백성들의 절박한 삶을 바라보고 올바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면적 통일성을 지닌다”며 “정론을 강조한 데 따른 문학적 심미성의 부족을 역설과 풍자, 기지 따위의 문체적 수사를 통해 상쇄하고 독자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간다”고 설명했다.

1737년 한양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아버지 박사유와 이창원의 딸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박지원은 열여덟 살 때 첫 단편 ‘광문자전’을 쓰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문소설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웅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호질’, ‘허생’, ‘열녀함양박씨전 병서’ 등을 창작했다. 탁월한 기행서 ‘열하일기’도 저술했다.

조선 양반들의 타락과 위선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 인간상을 제시한 연암, 파격적인 주제와 기발한 문체로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 주역이었던 박지원. 조선 최고 문장가의 소설과 문장은 200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생동한다. 아니, 조선 양반을 향한 범의 질타는 이제 돈에 포위된 현대인들에 대한 포효로 몰려오고 있었으니.

“대체 제 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한다. 네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쏘다니며, 황황히 팔을 걷어붙이며 눈깔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 심지어 돈을 ‘형’이라 부르지 않나, ‘장수가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지 않나. 이러고도 다시 인륜의 떳떳하고 변하지 않는 도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호질’, 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