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2일(현지시간) ‘마초(macho·남자답다의 스페인어)의 나라’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 200년 헌정사상 최초다. 상·하원 의원, 주지사 등 2만여 명의 역대 최대 선출직들과 함께 선출된다.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89년 만에 좌파 정권이 들어선 멕시코 얘기다.
30일 멕시코 선거관리위원회(INE)에 따르면 6월2일 선거에서 대통령을 포함해 2만700명의 대표가 선출된다. 대선과 총선, 지방의회 선거 등이 함께 진행되며 유권자 약 1억명이 주지사 9명, 상원의원 128명, 하원의원 500명, 지방자치단체 공직자 1만9000여명을 선출한다. 역대 최대 규모의 유권자 수와 선출 인원 숫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다. 현재 지지율 1, 2위 후보 모두 여성이기에 여성 대통령 당선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확정된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1824년 헌법이 제정된 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이다.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는 집권 여당인 국가재건운동(MORENA·모레나)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이다. 셰인바움은 모레나와 함께 좌파 계열 정당인 노동당, 녹색당 3당 연합 후보로 임기 말까지 지지율 60%대를 기록하고 있는 ‘포퓰리스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후계자다.
2위 후보는 우파 야당 연합 광역전선의 소치틀 갈베스다. 대선 후보는 시민운동당(MC) 소속 호르헤 알바레스 마이네스까지 3명이지만 지난 24일 기준 여론조사(여론조사업체 미토프스키)에 따르면 셰인바움이 48.9%, 갈베스가 28.1%, 마이네스가 10.3%로 1, 2위 후보 간의 대결로 압축된 상태다.
◆냉철함 vs 털털함… 공약 차이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만큼 후보들 정책엔 여성 관련 공약이 눈에 띈다. 멕시코는 여성 폭력이 만연하고 성차별이 심한 국가다. 극심한 ‘마초주의’, 즉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여성 혐오로 이어져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도 심각하다.
이러한 이유로 멕시코에선 과거부터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돼 왔다. 2003년 여성 후보를 30% 공천하도록 하는 ‘여성할당제’를 도입한 멕시코는 할당비율을 2009년 40%로 올렸다. 2015년에는 비율이 50%까지 높아졌고 2018년에는 의회 성비가 50대50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에 셰인바움은 선거운동 기간 높은 비율의 젠더 기반 폭력과 성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2위 후보인 갈베스가 내세운 주요 선거공약이기도 하다.
‘냉철한 과학자’로 불리는 셰인바움은 멕시코국립자치대(UNAM)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 출신이다. 종종 ‘차갑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셰인바움 선거 캠프에 있는 안토니오 산토스는 AP통신에 “누군가 제시한 의견을 뒷받침할 근거를 내놓지 못하면 확실한 근거를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셰인바움의 공약에선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정책들을 찾아볼 수 있다. 태양의 나라답게 태양광부터 풍력, 바이오 에너지, 수소까지 다양하다. 환경부에서도 근무 경험이 있는 공대 교수 출신인 셰인바움이 집권할 경우 기술을 활용한 에너지 전환 정책이 활발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냉철함을 내세운 셰인바움과 달리 갈베스는 털털함과 유쾌함을 장점으로 한다. 갈베스는 어릴 적 집이 너무 가난해 길거리에서 멕시코 전통음식인 타말을 팔며 가족과 생계를 이어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는 스마트 인프라시스템 관련 회사를 세워 아동 영양실조 퇴치와 원주민 여성 경제자립을 돕는 재단을 만들며 인기를 얻었다. 갈베스 후보는 지난 21일 열린 선거 전 마지막 토론회에서 셰인바움 후보에게 “당신이 10살에 발레를 추는 동안 나는 일을 해야 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를 위해 갈베스는 치안 강화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관대한 범죄 처벌 관련 정책을 비판하며 주 방위군은 물론 지역 경찰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갈베스는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구호인 “총알 대신 포옹”을 언급하며 “범죄자들을 위한 포옹은 끝났다”고 강조했다.
◆지지율 60% 현 대통령의 ‘후광’
2위 후보를 지지율 약 2배 차이로 앞서고 있는 셰인바움의 당선은 유력한 상황이다. 문제는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다.
셰인바움은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선주자 자리까지 올랐다. 6년 단임제인 멕시코 규정상 다시 출마할 수 없는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셰인바움 후보에 무한 신뢰를 보내며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 찍었다. 지난해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모레나당 행사에서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셰인바움에게 독수리 머리 모양의 지휘봉을 선물했다. 지지율이 6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는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제스처’였다. 셰인바움은 이후 TV 인터뷰에 출연해 “그(오브라도르 대통령)는 나에게 지휘봉을 줬고 권한도 줬다”고 말했다.
셰인바움의 선거운동이나 토론회를 살펴보면 그는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업적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셰인바움은 스스로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개혁 정책인 ‘4차 변혁’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이라며 선거 유세 과정에서 현 대통령 세일즈에 나서고 있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2018년 대통령 취임과 함께 멕시코 사회의 부패와 특권을 없애겠다며 ‘4차 변혁’을 일으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19세기 멕시코 독립전쟁, 개혁전쟁,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 이은 네 번째 개혁이다.
현 대통령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기만 하는 후광 정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정치학자 데니스 드레서는 “셰인바움은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순종적인 딸”이라고 설명했는데 실제로 그는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부유한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그들의 소득과 세금 기록을 공개하는 모습을 변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보여주기식’으로라도 오브라도르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상섭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교수는 “셰인바움이 후광정치를 하는 건 사실이며 후보와 대통령 간 정치적 갈등이 생겼다는 소식이 나올 시 지지율이 떨어질 것도 확실하다”면서도 “첫 여성 대통령으로서 멕시코 정치에서 처음 가보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에 새로운 이미지의 정부가 시작될 것”이라고 짚었다.
멕시코 국영석유업체인 페멕스(PEMEX) 구제책이 대표적이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취임 직후 55억달러(약 7조5762억원) 규모의 구제금융 계획을 발표하는 등 자금난을 겪은 페멕스의 회생에 앞장섰다. 이 같은 노력으로 페멕스는 현 정권 들어 승승장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하 교수는 “셰인바움이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추진해온 페멕스 중심의 정책을 가져가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석유가 아닌 재생에너지 개발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하고 있다”며 “이전 정부의 정책을 이어가는 동시에 자신만의 길을 가려고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