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마음… 만질 수 없는 것들… 무형을 유형에 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이승애, 세상 너머 세계와의 교감

정서·믿음 등 비물질적 요소 주제삼아
흑연·종이 주재료로 표현의 영역 확장
대상 내면에 깃든 생명력 재발견 시도
멈춰진 회화에 유동적 시간 더하기도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 음악은 소리 나지 않는 힘을 소리 나도록 해야 하고, 회화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자신의 저서 ‘감각의 논리’(2003)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그가 일컫는 힘이란 감각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신체라는 파동의 장 위에서 행사됨으로써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정서적 울림이다. 들뢰즈의 말처럼 회화의 행위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 공유된 시각적 경험을 매개 삼아 마음의 세계 속 하나의 공명을 일깨우고자 하는 바람일 것이다.

이승애, ‘서 있는 사람 Ⅰ’(2023)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만질 수 없는 것들

이승애(45)는 시야에 담기지 않는 내밀한 정서와 감정, 믿음과 정신 같은 무형의 비물질적 요소를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다. 목격되지 않는 무엇을 시각 세계에 불러들이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흑연과 종이를 주재료로 한 회화를 중심 매체 삼아 벽화 형태의 설치 작업 및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냈다.



이승애는 2004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20여년간 서울, 런던, 뉴욕, 베이징 등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을 선보였다. 2016년 영국 런던왕립예술대학교에서 석사를 취득했고 같은 해 발레리 베스톤 예술상(영국 런던)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에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그리기의 기초 도구인 연필은 그리는 힘의 강도에 따라 종이 위에 매번 다른 흑연 가루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단색의 흑연은 명도의 층계를 더욱 세밀하게 드러내는 한편 질감과 색감, 냄새와 성질 등 특유의 물성을 공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흑연과 종이로 작업하는 행위는 ‘형태가 없는 것들’을 탐구하고 이해해 보는 하나의 방법론”이며, “흑과 백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무수한 회색의 색조를 통해, ‘사이’에 위치하며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 주변을 맴돌며 포착되고자 하는 것들을 그려내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승애는 다듬어진 목재나 광물처럼 정제된 형태의 자연물 및 자기 자신의 기억이 서린 일상적 사물의 표면을 종이 탁본으로 떠낸 결과물을 회화의 구성 요소로 활용한다. 삶의 언저리에 고요한 자세로 머무르는 대상들 내면에 깃든 생명력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모든 정적인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생동하는 자연의 산물이다. 만물에 깃든 기운을 채집하고, 자신의 그림 안에 담아내려는 노력은 동양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맞닿는 면모를 보여준다. 무형의 정신적 요소를 그림의 형상 안에 담아내는 일을 통하여, 이승애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더 큰 세계와의 교감이다.

이승애, ‘디스턴트 룸_시그널’(2021-2022)

◆서 있는 사람, 사라짐으로 끝맺지 않는 세계

이승애가 작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서 있는 사람 Ⅰ’(2023)은 멈추어 있는 회화의 화면에 유동적인 시간의 속성을 더하여 만든 스톱모션 영상 연작 중 하나다. 한국 민간신앙에서 망자의 슬픔과 비탄을 위로하기 위하여 치르는 의식인 ‘씻김굿’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인 ‘길닦음’을 소재 삼아 제작됐다. 화면 속 종이로 만든 무구의 형상이 화면을 뒤덮으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강조한다. 물, 바람, 불, 연기 등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유기적 소리들이 영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시공간을 물들인다.

작가는 회화의 구조화된 서사 및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형태의 유사성’에 기반하여 자동기술하듯 연속되는 그리기의 방식을 실험해왔다. 화면 내 물성 및 형상이 자유롭게 증식하고 확장하며 특유의 비선형적 서사 구조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영상 작품은 상상적 영역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고정된 이야기 구조에 머무르지 않으며 직관에 의지하여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변형해 나아가는 스스로의 작업 과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화면 위에 시간을 끌어들인 것이다.

‘디스턴트 룸_시그널’(2021∼2022)은 이승애가 자신의 지난 개인전 ‘서 있는 사람’(2023년 7월12일∼8월19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 선보인 회화 작품 중 하나다. 향이나 초와 같이 작고 가느다란 사물들이 한껏 키를 키운 모습으로서 묘사된다. 여리고 소박하여 커다란 빛을 발산하기 어려운 대상들이 거듭 모여 외부의 세상과 “교신 가능한” 형태로서 재탄생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화면 좌측 상단에 쌓아 둔 작은 돌탑은 이름 없는 돌멩이 여럿에 담긴 소망을 저마다 종이 위에 탁본한 결과물이다. 나무의 결을 고스란히 품은 새와 식물들이 화면을 유영하는 가운데 향과 초가 지핀 불빛은 어느덧 연기가 되어 화면 높은 곳을 향하여서 피어난다. 섬세한 손으로 흑연을 어루만져 화면 위에 연기의 형상을 새기는 일은 사라지는 존재에게 영원의 숨을 불어넣는 회화의 또 다른 역량이다.

이승애는 오는 10월 서울 종로구 통의동 소재의 전시공간 보안여관에서의 개인전 및 12월 제24회 송은미술대상 본선 전시 참가를 앞두고 신작을 제작 중이다. 새롭게 선보일 작품은 “식물의 환각성을 매개로 구현되는 주술적 치유 행위”를 주제로 하여 그와 연계된 “원주민 토착신앙 및 그들 문화의 고유한 정신세계 그리고 그에 가해진 식민주의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식물의 탁본을 재료 삼아 만든 거대한 형상이 등장하는 회화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각 전시에 선보일 예정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