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일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결정했다.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정상회담에서 채택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탄생한 9·19 합의는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하고자 만들어졌다. 하지만 북한이 9·19 합의와 그 취지를 거듭 위반하면서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효력 정지를 공식 결정하면서 남북관계는 북한 핵·미사일 도발로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7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게 됐다.
◆“합의에 구애받지 않겠다” 경고
정부의 이번 결정은 9·19 합의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 도발에 강도 높게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을 북한에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북한의 거듭된 위반행위로 9·19 합의가 유명무실해졌지만, 사문화된 것과 정부 차원에서 효력 정지 결정을 내린 것은 그 무게감과 의미가 다르다.
북한의 대남 오물풍선은 명맥만 남은 9·19 합의의 마지막 동력마저 끊어버렸다. 북한이 띄운 오물풍선이 MDL을 넘어 한반도 전역으로 날아간 상황에서 북한과의 신뢰에 기반한 9·19 합의를 더 이상 유지하기는 어려웠다는 평가다. 일각에선 고도의 정치적 신뢰 구축 작업이 선행되어야 군사적 합의도 효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9·19 합의를 서둘렀던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정부는 북한의 위성항법장치(GPS) 교란 공격에 대응해 국제기구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합참 이성준 공보실장은 이날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GPS 교란 공격에 대해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위로서 국제적으로도 조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GPS 교란은 다른 회원국 통신을 방해하는 등 유해한 교신 혼신을 금지한 국제전기통신연합(ITU) 헌장에 어긋난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해사기구(IMO) 등에서 보장하는 민간항공기, 선박의 안전 운항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다.
◆공은 북한에…회색지대 전술 지속 가능성
정부는 9·19 합의 효력 정지로 MDL 부근에서의 군사훈련이 가능해지는 등 북한 도발에 충분하고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이 도발 수위를 높이면 우리도 대응수위를 높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북한의 오물풍선에 대해 정부가 검토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도 가능해졌다.
변수는 북한의 다음 행보다. 정전협정이 있으므로 9·19 합의가 효력을 잃었다고 해도 남북관계가 갑작스레 위험해질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정부가 9·19 합의 효력을 정지한 상황에서 대북 민간단체가 전단 살포에 나설 경우 북한이 맞대응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북한 김강일 국방성 부상은 2일 담화에서 “오물풍선 살포는 철저한 대응조치”라며 “한국 것들이 반공화국 삐라 살포를 재개하는 경우 발견되는 양과 건수에 따라 백배의 휴지와 오물량을 다시 집중 살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9·19 합의 효력 정지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상황에서 북한이 오물풍선을 재살포하는 것을 놓고 고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올해 들어 북한은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한·미의 고강도 맞대응을 초래하는 것은 회피하는 ‘회색지대 전술’을 구사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일종의 리스크 관리를 하는 셈이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북한은 핵·미사일 역량 고도화 여건을 만들고 그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고자 군사적 긴장을 높이겠지만, 수위 조절은 하고 있다”며 “강력한 힘으로 북한이 불필요한 행동을 못하도록 막는 것이 북한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통일부 “대북전단은 표현의 자유” 재확인
대북전단 살포 단체가 앞으로도 계속 대북전단을 날리겠다는 입장인 가운데 통일부가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과거처럼 단체에 자제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대북 강경기조 전환은 없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3일 정례브리핑에서 대북전단 추가 살포 시 정부 대응이 무엇인지 질문에 “전단 등 살포 문제는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취지를 고려해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접경지역 안전 우려를 고려해 살포 단체들에 자제 요청을 하거나 의견 조율을 할 것인지 묻자 “그건 현장에서 알아서 판단할 사항이라고 보고 있다”고 답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9월 남북관계발전법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 처벌 조항이 과도한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처벌조항이 없더라도 접경지역 지방자치단체의 행정력, 경찰력 등 다른 수단을 통해 제지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명박, 박근혜정부 시기에도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여당 대표가 직접 전단 살포 단체가 자제토록 설득해 정치적 해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헌재 결정 이후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현장에선 제지에 나서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간 정부가 헌재 결정을 오독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북한이 ‘오물풍선’으로 강경책을 쓰고 나오면서 정부가 대화나 설득을 통해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북한인권단체와의 해결 여지도 축소됐다. 자칫 북한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서다. 이날 정부가 자제 요청을 거부한 입장도 이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윤석열정부는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적극적 개입’에서 ‘소극적 개입’으로 입장을 바꿨고, 올해부턴 아예 해당 단체들에 대한 ‘거리두기’로 입장을 또 한 번 변경한 상태다.전단살포단체 측은 북풍이 불면 다시 대북전단 풍선을 날려 보낼 것이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물풍선 사건을 사과하면 대북전단 살포도 재고해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의 대남 오물풍선 살포에 대응해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를 검토하자 접경지역 주민들이 적대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평화와 연대를 위한 접경지역 주민·종교·시민사회 연석회의는 이날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로를 자극하는 적대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며 “이 상황을 해결할 해법은 확성기 방송 재개 등 심리전 확대가 아니라 대북전단 살포를 단속해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경기 파주시에 사는 김민혁씨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가 대남 풍선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탈북자 단체들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다. 연평도 주민 박태원 서해5도 평화운동본부 상임대표도 “한창 바쁜 조업 철에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