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심사도, 국정 감시 견제 활동도 법에 정한 대로 하도록 이번에는 원내대표가 반드시 관철해주기 바랍니다.”(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네.”(같은 당 박찬대 원내대표)
지난달 31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대표가 옆에 앉은 박 원내대표에게 22대 국회 전반기 원 구성 작업을 지체하지 말라고 공개 지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대화 일부다. 통상 정치 현안과 관련해 정리된 입장을 참석자들이 밝힌 뒤 비공개로 전환되던 당 회의 분위기가 22대 국회 들어 달라졌다. 이 대표가 마치 경기도지사 시절 실·국장 회의에서 휘하 공무원에게 지시하듯 말하면, 박 원내대표가 즉각 ‘명을 받드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이 대표를 정점으로 한 일극 체제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 당 안팎의 평가다.
◆“한 사람 위한 기득권 정당”
“1990년 1월 국회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 여당 민자당(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통일민주당의 합당 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스가 정하면 무엇이든 모두 우르르 따라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3당(민주정의, 통일민주, 신민주공화) 합당’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당 지도부에 의해 당론으로 정해진 사안이라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조차 이의 없이 복종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났다. 민주당은 그때와 달라졌을까. 당내 반응은 회의적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이야 상대(정부·여당)가 너무 못하니까 우리의 허점이 안 드러나 보이는 것일 뿐이지, 상대 진영이 안정세로 접어들게 되면 우리의 단점이 많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1인 독주를 하라고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이 아니다’라는 실망감을 국민들이 갖게 되면 다음 지방선거, 대선에선 민주당이 위태로울 수 있다. 민주당은 한 사람을 위한 기득권 정당이 아니다”라고 우려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원내대표도 당대표가 만든 사람이고, 당 분위기 자체가 이 대표에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회의에서 다른 의견을 밝히기가 어렵다. 어쩔 도리가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관옥 정치연구소 민의 소장은 “박광온 전 원내대표 때만 해도 이 대표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격이 굉장히 강했다”며 “지금의 박찬대 원내대표 같은 경우 이 대표가 만든 성격이 강하다. 한 몸의 성격이 강하다”고 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박 원내대표의 선출 배경에 대해 “친명계를 대표하는 핵심 인물로 그만 한 사람이 없다고 (이 대표 측에서) 본 것”이라며 “원내정당화보다는 이 대표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해 똘똘 뭉치려는 것”이라고 했다.
◆“팬덤에 일극 체제 강화할 것”
이 대표 일극 체제를 부추기는 데는 강성 팬덤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추미애 의원을 밀어주기 위해 경쟁 후보들을 개별 접촉해 ‘교통정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반발한 당원 2만명가량이 탈당하자 이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사태 수습을 위해 “당의 주인은 당원”이라고 연일 강조하며 기존 현역 의원들이 해 오던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선출 과정에도 당원 의견을 20% 반영하는 당헌·당규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대표의 대선 행보를 위해 당권·대권 분리 규정을 삭제하는 ‘맞춤형 개정’도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채진원 교수는 “당원이 당의 주인이라는 민주당의 주장은 얼핏 보면 그럴싸하고 탄탄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공중(public)’이 아닌 ‘대중(mass)’을 상대로 인기영합적 행태를 보이려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대중이 파편화된 존재라면, 공중은 공적 사안에 자발적·조직적으로 참여해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채 교수는 “개딸 팬덤이 이 대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 의원은 “지금보다 당원권이 더욱 강화될 경우 이 대표의 발언권은 보다 강해질 수밖에 없다”며 “이 대표 본인도 (통제 불능의 상황이 올지 몰라서) 상당히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당원들의 참여 폭을 넓혀 ‘정치적 효능감’을 높일 수는 있지만, 이 대표 자신 또한 당원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일 경우 적잖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개딸 팬덤과 친명 유튜브 채널의 결합은 민주당의 또 다른 걱정거리다. 이 대표 일극 체제 속 유튜브 생태계는 개딸 팬덤의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친명계에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이들 유튜브 채널은 이 대표의 메시지 홍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와 경제이익이 맞물려 ‘그릇된 다수결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의 한 인사는 “강성 유튜브 채널들이 광고, 클릭 수 등을 위해 이 대표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편향적으로 가게 된다”며 “팬덤은 유튜브 채널에, 그 채널은 팬덤에 기대면서 상업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대표가 보이는 포퓰리즘과 상업 공동체가 결합돼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폭발력을 일으키고, 그것이 당내 장악력 제고에 역할을 했다”며 “정치 이익과 경제이익이 함께 가는 판이 완성되니 다수결주의만 팽배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가 자꾸만 ‘국회와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으로 작동한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그보다는 다원주의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대의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4·10 총선 압승으로 원내 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트기 시작하면서다. 민주당은 ‘당원 중심 정당’이란 구호로 이 변화를 선전하지만, 당원에게 국회의원 권한을 양도하는 건 대의민주주의 원리에 엄연히 반한단 지적이 대다수다. ‘팬덤정치’가 횡행하는 현 정치 문화에서 ‘제왕적 당대표’ 현상 또한 강화할 수밖에 없다. 제왕적 당대표 현상은 대의민주주의의 주역인 정당 내 건전성을 헤친다. 세계일보와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는 공동기획으로 총 3회에 걸쳐 시리즈 ‘위기의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최근 민주당의 당헌·당규 개정 논란, 심화하는 제왕적 당대표 현상 등 대해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공동기획: 세계일보·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