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듣는다. 4분의 3박자로 계속 반복되는 리듬이 차츰차츰 내 내면으로 차오르며 형태도 없고 방향도 없는 무거운 불안 덩이를 잘게 잘게 부수며 서서히 나를 춤추게 한다. 라벨의 ‘볼레로’는 글이 잘 안 되거나 못 견디게 마음이 울적해지면 저절로 손이 가는 곡이다. 16분짜리 이 곡을 연달아 두세 번쯤 들으면 묘하게도 마음이 깨끗해지고 개운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은 내겐 둘도 없는 절친이다. 오늘도 이 곡을 들으며 악몽(?)이 될 뻔한 하루를 리듬에 태워 아주 멀리 보내버리곤 거의 30여년 만에 에우제네 이오네스코의 희곡집을 집어 든다.
본격적 서울 생활을 시작한 30대 초반, 나는 연극광처럼 참 많은 연극을 보러 다녔다. 연극 관계 일을 하는 몇몇 사람이 내 곁에 있어 초대권이 자주 생기는 덕분에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물론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이윤택의 ‘오구-죽음의 형식’이나 ‘시민K’ ‘비닐하우스’ 등등을 찬탄하며 보았다. 일명 부조리극으로 통하는 연극들이다. 부조리극 혹은 반연극, 전위극이라 불리는 이 장르는 1950~1960년대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것으로 전통적인 연극 형식을 파괴하거나 등장인물 간 대화의 무의미함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소통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인간 실존 상황을 보여주는 극이다. 그중 가장 큰 특징은 줄거리라 할 만한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오네스코, 베케트, 아르튀르 아다모트 등이 있다.
‘대머리 여가수’ 역시 줄거리 없는 연극으로 배우들이 끊임없이 나누는 어떤 맥락도 의미도 없는 대화를 통해 현대인의 허위의식과 소통 불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백 년 전의 작품이지만 1957년 프랑스 위셰트 극장에서 ‘수업’과 함께 재공연되면서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한 극장에서 무려 68년째 계속 공연되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