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랭보·위고… 예술가의 삶이 묻힌 ‘묘지 순례’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현암사/ 2만9500원

 

1900년대 초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가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두 사람의 관계는 독특했다. ‘계약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을 때면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었다.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수시로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렸다. 그렇게 51년간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 관계는 두 사람이 죽어서도 이어졌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가 묻힌 지 6년 후 보부아르가 그의 옆으로 왔다. 하나의 묘석 아래 합장된 두 사람, 사후 ‘동거’는 이렇게 이어진 셈이다.

미국의 유명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뉴욕에서 태어나고 뉴욕에서 눈을 감았지만, 현재 그의 묘지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아들에게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파리에, 그것도 본인이 극을 올리기도 했던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뮈엘 베케트를 콕 집어 그의 가까이에 묻어달라고 한 것이다.

 

죽고 난 다음에 뭐가 남을까 싶지만, 누구나 ‘한 줄의 묘비명’을 고민하듯 묘지라는 공간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묻힌다.

함정임/ 현암사/ 2만9500원

신간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는 함정임 작가가 32년간 이어온 유럽 예술가 ‘묘지 순례기’다. 샤를 보들레르, 마르셀린 데보르드 발모르,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 오노레 드 발자크, 스탕달, 빅토르 위고 등 20대부터 저자를 사로잡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가수, 극작가, 영화감독 등이 잠든 묘지가 총망라된다.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했다가 어머니의 재혼으로 고립된 운명에 맞닥뜨렸던 샤를 보들레르, 사뮈엘 베케트와 그의 옆에 묻히고 싶어했던 수전 손택 등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 국립묘지 팡테옹에는 200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선문에서 장례식을 치렀던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 빅토르 위고와 거짓된 권력과의 투쟁을 선언했던 에밀 졸라 등이, 몽마르트 묘지에는 누벨바그 영화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와 ‘진실’을 향한 혁명가의 소명으로 소설을 쓴 스탕달이 영면했다.

저자는 그들의 영원한 거처가 된 묘지에서, 이동하는 길에서, 생가에서, 그들이 지나온 인생 여정과 예술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묘지 순례기는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저자가 곳곳에서 남긴 330여장의 사진은 순례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