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찾은 베트남 하노이 맥주거리. 체감온도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위에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즐기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거리를 빼곡하게 메운 상점 간판 옆으로는 ‘하노이 맥주거리’, ‘짠내투어’, ‘정말 맛있어요’, ‘저렴한 요리의 정수’ 등 서툰 한국어 네온사인이 즐비하다. 그 아래로 소주 잔을 기울이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는 우리와 달리 각자 1병씩 주문해놓고 먹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맥주거리 안쪽에 자리한 ‘진로비비큐’(Jinro BBQ)는 외관부터 완벽한 한국 식당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 ‘포장마차’가 연상되는 ‘레트로’ 콘셉트로 꾸며진 매장 안에 들어서자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지지지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 . 그룹 소녀시대 노래 ‘Gee’다. 그 뒤로도 흥을 돋구는 K팝 노래가 이어졌다. 한쪽 벽면엔 한국어로 적힌 네온사인 전광판과 전속 모델 아이유 포스터로 채워져있다. 그 옆으로는 ‘JINRO’ 로고가 새겨진 화려한 포토존이 마련돼 있었다.
평일 저녁임에도 테이블 절반 정도가 채워져 있었다. 손님 대부분은 베트남 젊은이들이었다. 20대로 보이는 손님들이 K팝 노래를 들으며 드럼통 테이블에 둘러 앉아 파절임에 고기를 싸 먹고 있었다.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대학생 ‘부 티 땀’(Thắm 21 tuổi, 20대 여) 씨는 “과일소주를 좋아해서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곳을 찾는다”며 “친한 언니 소개로 소주를 알게 됐는데 입맛에도 맞고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어 자주 즐긴다”고 말했다.
땀 씨는 과일소주를 선호하는 이유로 낮은 도수와 달달한 맛을 꼽았다. 그는 “술을 조금만 마셔도 쉽게 붉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도수가 낮은 과일소주를 자주 먹는다”며 “일반 참이슬도 마셔봤는데 도수가 높다고 느꼈다. 과일소주가 더 맛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을 찾는 여성 고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주는 ‘~에 이슬’ 시리즈다. 레귤러 소주보다 낮은 13도인 자몽, 청포도, 자두, 딸기, 복숭아 5종의 달콤한 과일 맛이 나는 ‘이슬’시리즈가 베트남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주류 시장에서 위치를 견고히 하고 있다.
주류시장의 95%를 맥주가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하이트진로의 소주 판매는 최근 3개년 연평균 약 31% 성장을 기록했다. 2023년 현지 판매량은 베트남 진출 이후 최대 판매를 달성하며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가격은 한 병에 13만동(약 7000원)정도로 다소 가격대가 있었지만 가게 안 테이블마다 어김없이 초록색 병이 놓여져 있었다. 베트남에 부는 한류 열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소주와 한글 인테리어 접목, 현지인 공략 통했다”
하노이에서 진로BBQ를 운영하고 있는 김광욱(43)대표는 “(베트남에 K컬처 열풍이 불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며 “소주와 한글 인테리어를 접목해 마치 한국에 와서 먹고 마시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이 매장은 관광지에 위치해 있어 현지인과 외국인 관광객 비율이 비슷하지만 다른 매장은 99%가 현지인 손님이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창업 초창기부터 공략한 대상은 소비력이 강한 베트남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좁은 한인 상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신,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구 1억명 중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MZ세대는 베트남 내 소비 주도권 대부분을 쥐고 있다. MZ세대 중심으로 프리미엄 수요가 늘면서 향후 10년 내 중산층 소비자 계층이 3600만명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베트남 전체 인구 중 중산층 소비자 계층이 2000년에는 10% 미만이었으나 지난해 40%까지 증가했다. 오는 2030년에는 75%에 다다를 전망이다.
김 대표는 “이곳을 찾는 고객 1인당 3만~4만원 정도를 소비한다”며 “하루 100~150명 정도가 매장을 찾고 있는데, 20대 중반의 직장인 여성들과 중상층 손님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K팝, K드라마를 좋아하는 젊은층이 이곳에 오면 1980년대 한국 감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포토존에서 SNS로 인증샷을 남기려고 찾는 손님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MZ세대는 오티티(Over The Top, OTT는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용자가 원할 때 방송을 보여주는 VOD 서비스) 서비스와 각종 온라인 프로그램들로 한국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을 통해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한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초록색 병이 ‘소주’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호기심이 경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매장별로 다르지만 매달 40~50박스 정도 팔린다. 해마다 10~15%씩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참이슬’과 ‘이즈백’이 잘 팔린다면, 여기는 여성 고객이 많아 과일소주가 많이 나간다”며 “과일소주보다 도수가 높은 레귤러 소주는 남성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레귤러 소주로 칵테이나 하이볼 등 신제품을 개발, 판매해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고 ‘소맥’을 즐기는 현지인들도 많아지면서 레귤러 소주 판매량도 늘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엔 한국의 ‘소맥’을 즐기러 오는 분들도 많다”며 “초기에는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소맥 제조법' 등을 알려드렸는데, 요즘엔 다들 알고 오신다”고 말했다. 이어 “교민 사회와 로컬 시장을 합하면 진로소주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했다.
김 대표는 2018년 11월 초기자본 2억원으로 하노이 동다(Dong Da) 지역에 200㎡ 규모의 진로비비큐 1호점 낸 이후 매년 사업을 확장해왔고, 올해 초 이 곳에 4번째 직영점을 오픈했다. 매장 당 20명 정도의 현지인 직원이 있다. 매출액은 매년 15%씩 성장세다. 직영점이 하나 둘 늘면서 가맹사업도 늘려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이트진로의 현지 홍보활동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날 거리 곳곳에서 시음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주로 무료 시음을 제공하거나 게임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상품을 제공하는데,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두꺼비’ 캐릭터를 활용한 품목들이 많아 인기가 높다.
베트남 대형 마트 곳곳에 진로 소주가 배치돼있고, 실제로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증정품을 제공하는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시음에 제공되는 컵에 있는 QR 코드를 찍으면 공식 SNS 계정으로 연결돼 홍보 영상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 한류바람 업고 소주 인기…‘깔끔한 맛’으로 현지 입맛 사로잡아
같은날 오후,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하노이 후지마트에서도 하이트진로의 참이슬과 과일소주 5종을 만날 수 있었다. 하노이에 있는 11개 매장 가운데 3개 점포에 진로 단독 진열대가 설치돼 있다. 한 병 당 가격은 6만5000동(약 3500원) 정도로 가격대가 있지만, 소주를 찾는 이들은 어김없이 진로 소주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K소주 인기가 늘면서 유사 상품도 늘었다. 참이슬 외에도 ‘태양’, ‘힘’, ‘아라’ 등 생소한 이름을 가진 제품도 함께 진열돼 있었는데 하나같이 녹색병과 한글 제품명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이 매장에서만 매달 300병정도의 진로 소주가 팔린다”며 “한국 드라마를 보고 오는 소비자들 대부분 주저 없이 진로 소주를 선택한다. 진로가 인기를 끌면서 유사상표도 많이 출시되고 있지만 진로 점유율이 70%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후지마트 매장이 50개점으로 늘어나면 진로 소주 판매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소주 수출액은 1억141만달러(약 1385억원)로 2013년 이후 10년 만에 1억달러를 넘었다. 특히 베트남은 793만달러를 수출, 2년 새 2배 가까이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