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부모 인권 대립하지 않아”…‘탈시설 조례’ 당사자 이야기 들어주길 [밀착취재]

“‘장애인’ 대 ‘장애인 부모’ 대결 구도 부적절”
“탈시설 조례는 돌봄 부담 안고 사는 장애인 부모에게도 필요”

“부모들은 탈시설 지원 법안 반대한다”

 

“우리를 시설에 가두지 말라”

 

지난해 12월1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 ‘가깝고도 먼’ 두 집회가 열렸다. 하나는 장애인 당사자 단체 집회였다. 그들은 한 장애인거주시설 원장 신부를 규탄했다. 이 원장 신부는 탈시설 관련 토론회에서 발달장애인의 지능을 까마귀 지능에 빗대며 이들의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발언했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립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건 지능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난 4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박경인 활동가가 탈시설 조례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원 선임기자

다른 하나는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부모회 집회였다. 이들은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탈시설 조례)’를 폐지하라고 소리쳤다. 탈시설 조례가 ‘무연고 중증장애인을 거주시설에서 내몰게 하는 강제적인 정책’이라는 주장이었다.

 

장애인 단체와 장애인 부모 단체의 두 집회 사이 긴장감이 흘렀다. 경찰이 혹시 모를 충돌을 막으러 현장에 출동했다. 이때 한 사람이 경찰 인력을 비집고 부모 단체 집회 구역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모회 대표에게 편지를 건네며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고 말했다. 박경인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활동가였다.

 

그는 미혼모 시설에서 발달장애인으로 태어나 시설에서 살다가 23살 지역사회에 자립했다. 박 활동가는 “시설이 아니면 선택할 곳이 없게 만든, 부모님들에게만 버거운 짐을 지운 이 세상에 사과를 받아내자”고 말했다. 

 

탈시설 조례가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존폐 갈림길에 섰다. 지난 3월21일 서울시의회가 조례를 폐지하라는 내용의 주민조례청구를 수리한 데 이어 지난 17일 보건복지위원회가 탈시설 조례 폐지조례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전면에는 부모 단체가 있다. 조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의 구도로 그려지는 까닭이다. 조례 폐지안은 25일 열리는 시의회 본회의에서 표결할 전망이다.

 

지난 4월11일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앞두고 세계일보는 탈시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탈시설 조례가 시설을 없애자는 내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장애인이 원할 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근거법이며, 동시에 자녀를 시설에 입소시키지 않으면 전적으로 돌봄을 떠맡아야 하는 장애인 부모들에게도 꼭 필요한 법이라는 것이다.

지난 4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활동가 3명이 웃으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자립한 발달장애인이다. 이제원 선임기자

박 활동가는 탈시설 조례가 폐지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당장 탈시설 지원 정책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어도, 근거가 사라지는 만큼 정책이 축소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박 활동가는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사는 장애인들 사이에선 조례가 사라지면 시설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려 섞인 이야기가 돌고 있다”며 “지원이 줄어들면 자립을 생각하고 있는 장애인이 앞으로 도움받기가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다”고 토로했다.

 

당장 탈시설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시 ‘거주시설 연계 자립생활 지원사업’ 올해 예산 18억9991만원도 전액 삭감된 바 있다. 2013년부터 시행된 해당 사업은 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 거주시설을 연계해 시설 밖 경험을 통해 장애인의 욕구를 파악하고 나아가 탈시설 이후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박 활동가는 부모회에 묻고 싶다고 말했다. 지능이 낮은 장애인을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부모들의 마음은 괜찮냐는 것이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어’ ‘현실이 그래’라는 말이 부모님들에게 위로가 되는지, 시설에 간 자녀가 정말 행복해 보이는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시설 밖에서 살고 싶다는 목소리가 부모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며 복잡한 심경을 설명했다.

 

2017년 시설에서 나와 자립했다는 문석영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활동가는 “비장애인도 다 잘 사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탈시설 해서 못 살면 어떻게 하냐고 한다”며 “발달장애인은 약한 존재,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에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문석영 활동가가 말하고 있다. 이제원 선임기자

문 활동가는 자립 이후 친구와 인천으로 1박2일 여행 다녀온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둘이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서 바다도 보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 있을 때도 여행은 가 봤지만 항상 정해진 일정을 따라야만 했다”며 “탈시설 조례가 규정하는 충분한 활동 지원과 일자리, 집과 동료들이 있다면 누구나 시설에서 나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송효정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사무국장은 조례 폐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으로 이득을 얻는 건 결국 국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돌봄의 괴로움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장애인 부모들은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인 시설을 택하기 쉽다”며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장애인과 부모가 힘을 합쳐야 하지만 두 집단을 싸움 붙이는 식으로 구도가 형성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지난 17일 복지위는 탈시설 조례 폐지조례안과 함께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 조례 일부개정조례안’도 가결했다. 지난 5월27일 국민의힘 유만희 복지위 부위원장이 발의한 일부개정조례안은 장애인이 시설에서 퇴소해 자립할 경우 주거시설, 정착금 등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탈시설’이라는 용어는 뺐다. 이 역시 25일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