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왼쪽 볼이 부어 있었다. 충치야? 내가 묻자 친구는 애도 아니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니가 난 것 같아.” 나는 당장 치과에 가라고 말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사랑니를 바수어 뽑느라 혼쭐이 났던 나는 사랑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턱이 욱씬거렸다. 붓긴 했는데 딱히 아프진 않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흘깃 시계를 보았다. “병원 갈 시간도 없고.”
지금 맡은 프로젝트 기한이 너무 짧아 치과는커녕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친구는 이번만 바쁜 게 아니었다. 입사한 이래 그는 다양한 이유로 바빴고 늘 시간에 쫓겼다. 친구네 회사 앞으로 찾아가야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을 수밖에. 나는 친구의 상사를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그토록 많은 일을 떠넘기는 걸 보면 몹시 무능하거나 뻔뻔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너도 그만두고 나와. 친구는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고, 이직이 쉬운 줄 아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여기서 너무 오래 일했어. 다른 회사에 적응하려고 애쓰거나 새로운 걸 배우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왼쪽 볼을 쓰다듬으며 친구는 회사로 돌아갔다. 나올 때보다 더 어두운 낯빛이었다. 일도 나이도 겁도 너무 많은 친구에게 조언이나 걱정을 건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뭐든 너무 많네. 나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며칠 후 친구는 대뜸 전화를 걸어서는 사랑니가 아니래, 라고 말했다. 야간진료하는 치과가 있어 들어갔더니 의사가 이건 못 뽑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랑니가 아니라 어금니래.” 나는 어리둥절해져 다시 물었다. 어금니라고? “드물게 어금니가 늦게 나는 사람이 있대. 이 나이에 어금니가 난다니, 애도 아니고.” 친구가 혼잣말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네 번째 큰 어금니가 이제서야 난다니. 그럼 나는 지금껏 어금니 세 개로만 살아온 셈이잖아? 아직도 덜 자랐네, 내가.” 친구는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잠시 멈추었다. “내가 아직도 덜 자랐네.” “한참 덜 자랐지.” “아직도 자랄 게 남았었네, 내가.” “한참 남았지.” 친구가 고요히 웃었다.
충치가 되지 않도록 관리에 특히 신경쓰라고, 의사가 잇솔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도 했다. “어금니도 새로 났는데 이 참에.” 나는 그다음 이어질 친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친구가 아직 말도 안 끝났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네 번째 어금니만큼이나 뒤늦은, 그러나 더없이 선명한 웃음이었다.
안보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