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상법(제382조의 3)은 ‘기업의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충실하게 직무를 봐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정해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까지 확대하는 방안이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의 핵심 안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같은 방향으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는 취지에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개정을 위한 총대를 멘 가운데 재계는 소송 남발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이 원장은 ‘배임죄 폐지 동시 추진’이라는 새로운 카드로 설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배임죄 폐지 등 성급한 결정보다는 소액주주 동의제와 같은 보완법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이른바 ‘동학 개미’ 1400만명 시대를 맞아 주주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법 개정 문제가 아닌,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복현이 쏘아 올린 공… “상법 개정”
상법 개정의 주체는 법무부나 금융위원회이지만 이 이슈를 가장 먼저 그리고 열렬히 공개 언급하는 고위 당국자는 이 원장이다. 이 원장은 주주 권리 확대를 위해 상법 개정이 밸류업에 긍정적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한다면 소액주주에 큰 손해를 끼치고 대주주만 이익을 보는 이사회 결정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당장 재계는 강력 반발한다. 자본 조달을 비롯한 이사회의 일상적 경영판단에 큰 혼란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경제인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등 8개 경제단체는 24일 공동 건의서를 통해 상법 개정이 현행 법체계를 훼손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또 형법상 배임죄 처벌 등 사법 리스크가 막중해진다면서 “이사 충실의무를 확대하면 기업의 신속한 경영판단을 막아 경쟁력이 저하되고 경영권 공격세력에 악용되는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구조조정이나 이사회의 정당한 의사결정을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결정’으로 왜곡하고 부당하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최근 주주권을 앞세운 행동주의 펀드들이 한국 기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이즌필이나 차등 의결권 등 없이는 상법 개정안으로 경영권 방어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에 주주권 옹호 단체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25일 성명서를 내고 “한경협 등은 명확한 사실과 법리를 왜곡하고 호도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포럼은 한경협 등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벗어난다고 주장한 데 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업지배구조 원칙(Principles of Corporate Governance)에 따르면 이사의 의무에 대해 ‘회사와 모든 주주를 위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30여년 동안 합병, 분할, 지주회사 전환과정에서 일반주주 지분율 등이 축소되고 지배주주의 지배력은 강화됐다”며 “이런 부당한 자본거래가 계속되어도 된다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상장으로 거액의 자본을 조달할 때는 일반주주에게 각종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왜 일반주주 이익을 지배주주와 같은 정도로 공평하게 보호할 의무나 책임은 부담하지 않으려는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배임죄 폐지 가능?… “자칫 역효과”
재계 반발이 거세자 이 원장은 ‘배임죄 폐지’를 패키지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지난 14일 예정에 없던 기자 브리핑을 열고 이사 충실의무 대상 확대와 배임죄 폐지를 동시 추진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소송이 남발될 것이라는 재계 주장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이 원장은 당시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 폐지가 낫다”며 “회사법 영역에서는 소액주주 보호가 미흡하고, 형사법 영역에서는 이사회 의사결정에 과도한 형사처벌을 해 양쪽 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배임죄 폐지까지는 어렵다면 (죄) 구성요건에 사적 목적 등을 명시하는 방법도 가능하다”며 “상법에 ‘경영판단 원칙’을 명확히 하고 특별배임죄만 폐지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아가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최근 언론에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한다면 배임죄 자체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거나 아니면 배임에서 면책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놓아야 할 것으로 본다”며 지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재계는 여전히 완고하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배임죄 폐지를 모두 개혁 대상으로 삼자는 제안에 찬성하지 않는 기류가 강하다.
한경협 관계자는 “(배임죄 폐지와 관련해) 세부사항이 나오지 않아 특별하게 언급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배임죄는 그 문제대로 다뤄야지, 이사회 충실의무 확대와 같이 연계해서 갈 사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사 충실의무 대상 확대와 배임죄 폐지가 동시 추진되면 자칫 대주주에 유리해지는 역효과만 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배임죄가 폐지되면 소액주주가 기업 이사회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민사소송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승소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소수주주 동의제가 대안으로 제기되는 배경이다. 회사의 인수·합병이나 분할 등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 대주주를 뺀 소수 주주 과반 결의를 받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나아가 사외이사 선임 시 주주 동의를 받도록 하거나 임원추천위원회에 일반주주가 참여하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주장이다.
한준범 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와이즈포레스트 대표)은 “미국에선 주주들 사이의 이익충돌 상황에서 독립적인 위원회가 판단한 뒤 지배주주가 빠지고 나머지 주주가 승인하면 된다는 원칙이 있다”며 “한국 상법에도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368조 3항)’라는 조항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당장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일 태세는 아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법무부 및 금융위와 공청회를 거쳐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발표 때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