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락 기다리고 있어. 혹시라도, 아직 모르니까….”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 이틀째인 25일 오후, 경기 화성시 청사 인근 모두누림센터 2층에 마련된 유가족 대기실 앞 복도에서 A씨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화성 참사 유가족들의 모습은 여느 재난과는 달랐다. 사망자 모두 시신이 심각하게 손상돼 신원 확인이 어려운 탓에 이틀째에도 빈소는 차려지지 않았다. 연락이 닿지 않는 가족의 생사라도 알기 위해 전날부터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 곳곳을 헤매던 유가족들은 이날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하나둘 대기실을 찾기 시작했다.
부검을 위해 국과수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유가족의 항의를 받고 운구 차량이 1시간여 만에 되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화재 초기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가 결국 숨진 김모(52)씨의 시신을 태운 차량이 이날 오전 10시30분쯤 국과수로 출발하자, 김씨의 아내로 보이는 한 여성은 “부검 전에 아이들한테 아빠가 가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며 “아이들이 볼 수 있게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운구차는 결국 낮 12시10분쯤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1분30여초간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유족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국과수는 이날 오후 1시부터 사망자 시신에 대한 부검에 착수했다. 시신 대다수는 성별 구분조차 어려울 정도 훼손이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현재 신원이 확인된 피해자는 23명 중 2명에 불과하다.
신원 확인 작업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망자 중 대다수는 중국 동포 등 외국인 근로자로 확인돼 가족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경찰은 현지에서 피해자 가족의 DNA를 채취하는 등 최대한 신속하게 작업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외국인 피해자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피해자 신원이 특정되면 유족 등을 대상으로 입국 및 체류, 통역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사상자와 유가족을 대상으로 피해 복구를 위한 법률 지원을 하는 한편 스마일센터를 통해 심리 치유서비스를 제공하고, 검찰청 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해 치료비·장례비 등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망자 18명은 불법 체류자는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관계자는 “신원 확인이 끝나지 않았다”면서도 “신원 추정이 맞다는 전제하에 (해당 외국인들이) 체류 자격이 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화재 현장을 찾은 강인선 외교부 2차관은 현장 관계자에게 “외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유가족 지원 등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현장에 있는 소방관 등의 안전도 각별히 신경 써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화성시는 이날 청사 1층에 참사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들을 기리는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곳을 포함해 서신면체육관 2층, 동탄역, 병점역 등 총 4곳에 합동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E9비자 입국 최대… 산재사망 10% 외국인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 등 외국인 근로자의 산업재해 사고가 속출하면서 이들에 대한 산재 예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올해 고용허가제 비전문 취업비자(E9)로 입국하는 외국인 근로자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면서, 외국인 중대재해 관리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25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유족급여 승인 기준 산재 사고 사망자 812명 중 외국인은 85명으로 10.5%를 차지했다. 외국인 사망자 규모는 2022년(85명)과 동일하나 지난해 전체 산재 사고 사망자 수가 줄면서 비중은 소폭 늘었다. 이 비중은 매해 소폭 변동은 있으나 대체로 10% 안팎으로 집계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외국인 취업자 수는 92만3000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달 기준 15세 이상 취업자가 2891만5000명인 것을 고려하면 전체 취업자 중 외국인 비중은 3.2% 정도다. 고용보험 상시가입자 기준으로 하면 비중은 더 줄어든다. 지난달 전체 고용보험 상시가입자가 1539만3000명, 이 중 E9 비자와 방문취업 비자(H2)를 합한 외국인 규모는 23만4000명으로 전체의 1.5%를 차지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 규모를 고려해도 외국인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5% 미만인데 이들의 산재 사고 사망 비율을 생각하면 외국인이 특히 산재에 취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산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외국인 근로자까지 포함한다면 (사망) 비중이 더 높을 것”이라고 했다.
산업계에 퍼진 인력난 극복을 위해 올해 외국인 도입 규모가 대폭 늘었다는 점에서 우려는 더 커진다. 정부는 올해 E9 도입 규모를 지난해보다 4만5000명 늘어난 16만5000명으로 정했다. 기존 E9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이 종사할 수 없던 음식점업(한식)과 호텔·콘도업 사업장에서도 7월부터 근무가 가능하다.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중대재해 가능성은 더 커진 셈이다.
정부는 외국인 근로자가 산재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예방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용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3월에 ‘외국인 근로자 산업재해 예방 강화 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공단 관계자는 “외국인의 산재 예방 필요성이 높아져 연구에 나서게 됐다”며 “연말쯤 연구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행정안전부·환경부·외교부 등 각 부처가 참석하는 중앙사고수습본부 긴급 관계기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외국인 등 산재 취약 근로자에 대한 안전관리 강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 장관은 사망자 중 외국인 근로자가 다수인 만큼 유족 지원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장례 지원과 산재보상, 사업주와의 협의 등도 조치해 달라고 당부했다.
전문가들은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를 계기로 외국인 근로자 도입 뒤 안전교육 등 ‘관리’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종선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안전교육이 미비한 상태에서 현장에 투입된 게 아닌가 생각되고, 사고 발생 시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