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왕피천 때묻지 않은 청정자연 가득/투명한 물 발 담그고 계곡 길 따라 걸으며 힐링/월송정숲길·평해사구습지생태공원·월송정해변 맨발로 걷기 좋아
거대한 용이 방금 훑고 지나간 듯한 기암괴석 계곡. 한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맑고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그자 5분도 지나지 않아 등골까지 서늘하다. 물 위로 부서져 윤슬로 반짝이는 찬란한 여름의 태양. 천상의 화음처럼 신비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이름 모를 새들. 그리고 계곡을 따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싱그러운 풀잎 향까지. 인적 드물어 고요한 왕피천 계곡에 앉아 유유자적, 신선놀음을 즐긴다.
◆때 묻지 않은 자연… 왕피천 트레킹
7월. 계절은 한여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올해는 유난히 무더운 것 같다. 이미 6월부터 낮 기온 섭씨 30도를 훌쩍 넘어설 정도이니. 더구나 장맛비까지 오락가락해 습도는 높고 불쾌지수도 한계치까지 치솟는다. 이제 좀 쉬어가야 할 때. 계곡, 솔숲, 바다를 모두 즐길 수 있는 청청자연이 가득한 경북 울진으로 달려간다.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굴구지 농촌체험 휴양마을로 들어서자 정말 접시처럼 활짝 핀 빨간 접시꽃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니 고향마을에 온 듯 정겹다. 굴구지 마을은 왕피천 하류에서 아홉 고개를 넘어야 만날 수 있어 예로부터 구고동 또는 굴구지로 불린 울진의 오지마을. 왕피천이 한 바퀴 휘돌아 나가고 남수산과 통고산 지맥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둘러싼 마을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울창한 금강소나무숲까지 더해져 천혜의 비경으로 꼽힌다.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논밭을 가르는 오솔길 따라 10여분을 걷자 장쾌한 물소리가 시원하게 청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무공해 자연을 호흡하며 걷는 트레킹의 시작점, 왕피천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는 어린 시절 추억으로 잡아 이끄는 왕피천의 포토존. 중간쯤에 서자 발아래로 시원한 파열음을 내며 흐르는 물줄기가 가슴속 깊은 스트레스까지 모두 부숴 가루로 흩날려 버린다.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울진군 금강송면과 근남면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60.95㎞의 물길.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쉽지 않은 왕피천에는 산양, 삵, 담비, 노랑무늬붓꽃, 산작약 등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면적은 102.84㎢로 북한산국립공원의 1.3배에 달한다. 2013년 12월 환경부가 선정한 전국 생태관광지역 12곳 중 하나로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체험·교육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꼭꼭 숨겨진 환상적인 풍경 등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어 트레킹 마니아들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왕피천유역 생태탐방 둘레길은 다양한 코스가 마련돼 입맛대로 올라가면 된다. 1구간 금담비길(10.5㎞)은 탐방안내소~박달재~골안교~한천마을~거리고마을로 이어지고, 1-1구간 천년고찰탐방길(13.4㎞)은 탐방안내소~박달재~거북바위~불영사를 거쳐 탐방안내소로 돌아온다. 2구간 왕피천마을길(12.4㎞)은 거리고마을~실둑마을~임광터~속사마을~굴구지마을로 연결되고, 2-1 왕피천따라가길(15.6㎞)은 굴구지마을~수곡삼거리~천축산입구~속사마을을 거쳐 왕피천을 따라 굴구지마을로 돌아온다. 3구간 천천길(14.3㎞)은 굴구지마을~청암정~구산마을입구~막금마을~임도삼거리~행곡마을로 이어지고, 3-1구간 보부상과 명당길(10.4㎞)은 막금마을~찬물내기습지~불영사휴게소내림길을 거쳐 막금마을로 회귀한다. 4구간 불영따라 나그네길(14.5㎞)은 행곡마을~제1전망대~제2전망대~불영사~탐방안내소로 이어진다.
◆용의 모습을 닮은 용소에 서다
가장 인기 있는 트레킹은 2-1코스 중 속사마을~굴구지마을 4.8㎞ 구간. 차도가 없어 왕피천을 따라 호젓하게 걷기 좋다. 트레킹 방법은 두 가지다. 휘어지는 계곡을 따라 모래톱과 자갈톱을 걷거나 바위를 오르며 폭 5~8m 물을 건너는 계곡 트레킹이 인기다. 물에 발을 적시기 싫다면 그냥 계곡을 따라 산자락에 조성된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면 된다. 굴구지마을에서 상류의 속사마을 쪽으로 이동한다면 갈 때는 탐방로, 올 때는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 좀 더 편안하다. 속사마을에서 굴구지마을로 이동할 때는 그 반대가 걷기 쉽다.
굴구지마을에서 속사마을 방면으로 걷는다. 나무데크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탐방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20여분 걷다 보면 다시 길은 왕피천을 드러낸다. 바위와 거친 돌들이 깔린 자갈톱을 헤치고 10여분 오르면 수심 10m로 왕피천에서 가장 깊은 용소가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왕피천은 위용에 비해 완만해 물길을 따라 걸어도 크게 힘들지 않지만, 용소는 물길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이 휘돌기 때문에 위험하다. 따라서 계곡 트레킹을 하더라도 이 구간만은 바위에서 감상만 하고 생태탐방로로 우회해야 한다.
다시 탐방로를 따라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쉬기 좋은 학소대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용소의 또 따른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제일 앞의 바위는 용의 머리를 닮았고 그 뒤로 몸통에 해당하는 암벽들이 줄지어 선 기이한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지인 왕피천 생태탐방은 사전예약한 뒤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탐방객 안전을 지키고 왕피천 유역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목·일요일은 당일코스, 금·토요일은 당일 또는 1박2일로 이용 가능하다. 월·화요일은 쉰다. 홈페이지를 통해 원하는 구간을 예약할 수 있다.
◆맨발로 걷는 월송정 숲길
굴구지마을에서 차로 40분 거리에는 바다와 솔숲을 모두 즐기는 관동팔경, 월송정이 기다린다. 월송정 나눔길로 들어서자 운치 있게 휘어지며 자란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뤘고 나무 사이로 오솔길이 이리저리 이어진다. 맨발로 천천히 걷는다. 몇 해 동안 쌓이고 쌓인 솔잎이 발바닥의 촉각을 자극하고 시원한 모래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니 발 마사지를 받는 듯 여행이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10여분을 걸으면 월송정 해변으로 들어서는 2층 누각 월송정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뽐낸다.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진 오래된 누각으로 1980년대 옛 양식을 본떠 새롭게 지었다. 신선이 솔숲을 날아다닌다는 뜻에서 ‘월송(越松)’으로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요즘은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月松)’으로 더 유명하다. 비가 갠 후 떠오른 맑은 달빛이 소나무 그늘에 비칠 때 가장 아름다운 풍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성종도 이런 풍경에 반했다. 그는 화가에게 조선 팔도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들을 그려서 올리라고 명했고, 화가가 함경도 영흥 용흥각과 월송정을 그려 올리자 용흥각의 버들과 부용이 좋기는 하나 경치로는 월송정만 못하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숙종과 정조도 시를 지어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했다. 실제 월송정을 통과하면 은빛 모래밭, 동해의 쪽빛 바다, 해송 1만5000그루가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바다 쪽으로 걷다 보면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는 평해사구습지생태공원이 등장한다. 동해안의 훼손되지 않은 해안사구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모습이 가득한 곳이다. 하늘과 맞닿는 사구 위에 서면 신비로운 느낌의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생태공원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 종인 수달과 매, 2급 종인 삵, 말똥가리, 큰말똥가리, 새흘리기, 가시고기 등 총 7종이 서식한다. 또 갯메꽃, 통보리사초, 순비기나무 등 사구식물과 갈대, 부들 등 습지식물이 군락을 이뤄 자연을 호흡하며 힐링하기 좋다. 울창한 해송숲 사이로 편하게 놓인 데크길을 끝까지 걸으면 남대천 하구가 푸른 바다와 만나는 월송정 해변이 펼쳐져 낭만적인 여름여행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