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의 결과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여야는 헌법은 물론 선거법 개정에도 나섰다. 그때까지는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시행됐다. 여당이 돈과 인재, 조직 등 정치적 자원을 사실상 독점한 권위주의 시대였던 만큼 이는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여당이 사실상 거저 가져가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남은 한 석을 놓고 야당 후보들끼리 경쟁하는 구도였으니 선거만 했다 하면 여당이 손쉽게 과반 의석을 챙겼다.
자연히 선거법 개정 협상에서 나선 여당 민정당의 입장은 중선거구제 고수였다. 김영삼(YS) 총재의 민주당도 속내는 비슷했다. 김대중(DJ) 총재의 평민당만이 소선거구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정치 개혁의 목소리가 드높던 시절 국민들 사이에 ‘낡은 제도’라는 인식이 강한 중선거구제를 지속하자는 것은 명분이 약했다. YS와 DJ의 합의 아래 한 개 지역구에서 의원을 한 명만 뽑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서 치른 1988년 13대 총선은 민정당이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하며 여소야대 국회를 낳았다. 또 YS를 대신해 DJ가 제1야당 총재로 올라섰다. 소선거구제 도입의 최대 수혜자는 DJ였던 셈이다.
소선거구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당선자를 제외한 2등 이하 모든 낙선자들이 받은 표가 전부 사표(死票)가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후보 네 명이 경합하는 상황을 가정할 때 30% 정도의 낮은 득표율로도 이길 수 있다. 이 경우 당선자가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70%가 사표다. 지난 4월 22대 총선에서 총 254개 지역구의 정당별 득표율을 계산해보니 민주당이 약 50.5%, 국민의힘은 45.1%를 얻은 것으로 집계됐다. 5.4%p 차이인데도 지역구 의석수는 민주당 161석(63.2%), 국민의힘 90석(35.4%)으로 크게 벌어졌다. 아슬아슬하게 2위로 낙선한 국민의힘 후보들이 받은 사표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영국은 비례대표가 없고 지역구 의원만 있는 소선거구제의 나라다. 지난 4일 치러진 하원 총선에서 노동당이 전체 650석 중 3분의 2가량인 412석을 확보해 1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다. 보수당은 겨우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런데 전국 득표율을 따져보니 노동당은 33.8%, 보수당은 23.7%로 각각 나타났다. 10%p 차이인데 의석수는 거의 300석이나 차이가 난다. 극우 성향 영국개혁당은 14.3%를 득표해 노동당, 보수당에 이어 3위를 기록했으나 고작 5석을 차지했을 뿐이다. 승자인 노동당을 제외한 보수당이나 영국개혁당 입장에선 ‘소선거구제의 저주’를 제대로 겪은 선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