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R&D 예산 삭감, 산업계 ESG경쟁력 ‘비상’

탄소저감 등 친환경연구비 끊겨
대형건설사 5곳 과제 60% 타격
글로벌 수주경쟁력 약화 불가피

친환경 기술, 세계적 트렌드인데… 해외시장 진출 ‘빨간불’

시멘트 CO₂ 저감·미세먼지 관리기술 등
예산 깎인 과제 절반 이상 ‘친환경 연구’
실증 단계서 제동 걸려 성과 못 내기도
“과제 완성까지 예정보다 2년 지연 전망”

중동 등 120여개국 기후변화협약 가입
입찰부터 시공까지 모든 과정서 타격
“국내기업 RE100 등 ESG 노력 뒤처져
글로벌 투자 우선순위서 밀릴 수밖에”

“정부가 난데없이 예산을 대폭 줄여버리니 내부에서는 차라리 연구를 중단하자는 말까지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에서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연구원은 최근 기자에게 답답함을 호소했다.

지난해 12월 말 해당 연구원이 소속된 건설사가 정부 기관으로부터 수행 중이던 친환경 관련 정부 연구 과제 예산 삭감 ‘공식 의견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기업 쪽에서 보면 당장 이윤은 기대할 게 없는 미래 투자형 R&D라 약속된 정부 지원금 없이 개발을 이어가기 어려우니 내부에서 연구 중단까지 고민하는 것이다.

 

최근 “내년부터는 연구 예산을 확대해준다”는 담당 기관의 연락이 있었지만 “삭감 통보 때와는 달리 비공식적인 ‘말’뿐이었던지라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고 그는 세계일보에 말했다.

 

윤석열정부의 R&D 예산 4조여원 삭감 여파가 주요 과학기술계는 물론 산업계 곳곳에 미치고 있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산업 분야와 우리가 기술력으로 치고 나가야 할 해외 수주 현장 등에도 파장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탄소 저감이 중요해지는 와중에 탄소 저감 등 친환경 관련 연구 분야 위주로 R&D 삭감돼 그 피해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8일 세계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대형 건설사 5곳이 수행 중인 정부 R&D 과제 25개 중 예산이 삭감된 과제는 13개로 절반이 넘는다.

 

삭감 규모는 크게는 약 60%부터 작게는 약 20% 수준이다. 예산이 삭감된 과제 중 절반 이상인 7개 과제는 탄소 저감 등 친환경과 관련된 연구로 확인됐다.

구체적으로 시멘트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CO₂) 저감 기술 개발, 탄소 포집 연계형 개질기 개발, 자원에너지 회수형 하·폐수처리 공정 기술 개발, 사업장 미세먼지 지능형 저감·관리 기술 개발 등이 포함됐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이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A건설사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으로부터 따낸 ‘통합 바이오가스화를 통한 에너지 회수율 제고 및 통합운영관리 기술 개발’의 경우 올해 연구 예산이 기존 61억8200만원에서 26억7900만원으로 약 56% 삭감됐다. 총 연구 기간 4년9개월 중 올해가 본격적인 ‘실증’ 단계인 3차연도인데 제동이 걸린 것이다.

 

동일한 기관으로부터 ‘소각사업장의 대기오염물질 배출 저감을 위한 실시간 사물인터넷(IoT) 모니터링 솔루션 및 대기오염방지설비의 인공지능(AI) 제어 솔루션 개발’ 연구를 받은 B건설사의 경우 연구 예산이 60%가량 날아갔다. 총 연구 기간 2년8개월 중 2차연도인 올해 연구비가 기존 11억7900만원에서 4억6500만원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R&D 분야 한 관계자는 “예산이 이렇게 줄어들면 해당 과제 완성까지 시간은 예정보다 2년가량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건설사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23년 8월 22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건설사의 정부 연구 과제 예산 축소는 올해 R&D 예산 대규모 삭감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정부는 ‘R&D다운 R&D’를 이유로 전 부처 R&D 관련 올해 예산을 전년 대비 4조원 이상 삭감한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한 바 있다.

 

무엇보다 건설사에 집중된 환경 관련 R&D 예산 삭감은 글로벌 수주 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세계적 트렌드 속에서 친환경 기술경쟁력 약화는 입찰부터 시공까지 전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엽 해외건설협회 본부장은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주로 진출하는 중동을 포함해 120여개국이 기후변화협약에 가입돼 있어 환경영향평가에서 탄소 절감이나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금도 그렇지만 향후에는 환경 기술이 떨어지는 건설사의 경우 입찰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사업 투자금 확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규모 건설 사업의 경우 정부 혹은 대규모 펀드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또한 ESG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추세인 탓이다.

 

송두삼 성균관대 교수(환경공학)는 “글로벌 투자사들이 다 ESG펀드를 하고 있다. 이는 국내외 동일하다”며 “그런데 해외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하면 국내 기업들의 RE100(100% 재생에너지 사용 캠페인) 등 ESG 노력이 한참 뒤떨어지니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글로벌펀드의 투자기준이 되는 대표적 지표인 ‘ESG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의 ESG 평가(CCC∼AAA 총 7단계)에 따르면 중국을 제외한 상위 글로벌 건설사들 모두 A등급 이상을 기록한 반면 한국 건설사들은 평균 BBB거나 평가조차 없었다.

 

미국 건설엔지니어링 전문지 ENR이 발표한 지난해 글로벌 건설사 상위 15개 회사 중 1위를 차지한 프랑스 빈치의 MSCI ESG 등급은 A이고 부이그와 에파주는 각각 AA였으며, 스페인의 ACS는 AA, 스웨덴의 스칸스카는 A였다.

 

건설사 친환경 R&D 삭감은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목표 달성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올해 1차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를 2018년 대비 40% 감축한 436만6000t으로 설정했다. 유엔환경계획(UNEP)에 따르면 건설산업은 세계 에너지 생산 관련 탄소배출량의 37%를 차지하는 등 탄소 배출이 큰 산업이다. 콘크리트의 주원료인 시멘트 1t 제조 시 약 800㎏의 탄소가 발생하는 등 시멘트산업은 대표적인 탄소 다(多)배출 산업으로 분류된다. 또 시멘트는 유럽연합(EU)이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탄소국경조정세(CBAM) 규제 대상 6개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