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견인한 女문학… 주변 아닌 중심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개화기∼90년대 韓 여성 작가
근현대 여성문학 작품들 엮어
‘여학교설시통문’ 원류로 평가

“...슬프도다. 전일을 생각하면 사나이가 위력으로 여편네를 압제하려고 한갓 옛글을 빙자하여 말하되 여자는 안에 있어 밖을 말하지 말며 술과 밥을 지음이 마땅하다 하는지라. 어찌하여 사지 육체가 사나이와 일반이거늘 이 같은 압제를 받아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 모양이 되리오. 이제는 옛 풍규를 전폐하고 개명 진보하여 우리나라도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각항 재주를 배워 일후에 여중 군자들이 되게 할 차로 방장 여학교를 창설하오니 유지하신 우리 동포 형제 여러 여중 영웅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지심을 내어 귀한 여아들을 우리 여학교에 들여보내라 하시거든 곧 착명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소속 연구자들이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으니 이를 위한 여학교를 설립하자는 내용의 ‘여학교설시통문’의 일부로, 이 소사와 김 소사라는 두 여성이 1898년 9월8일자 ‘황성신문’, 9월9일자 ‘독립신문’에 차례로 전문을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여학교설시통문’을 시작으로 개화기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여성 작가들의 근현대 여성문학 작품을 엮은 7권짜리 ‘한국 여성문학 선집’(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민음사)이 9일 출간됐다. 선집은 각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되, 시와 소설,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기존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망라했다. 아울러 전문적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백과사전식 구성으로 구성됐다.

 

특히 기존 문학사에서는 1918년 잡지에 발표된 나혜석의 소설 ‘경희’가 여성문학의 원류로 봤다면, 이번 선집에선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봤다. 이와 관련, 연구 책임을 맡은 김양순 한림대 교수는 ‘여학교설시통문’에 대해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이라고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평가했다. 이 글을 발표한 이 소사와 김 소사 두 여성은 실제로 이듬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했고, 이로부터 20년 뒤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원류로 평가되는 나혜석과 김일엽, 김명순 등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날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선집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여성문학은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돼 왔다”며 “이번 선집은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양순 교수 외에도 책임 편집을 맡은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칼리지 교수와 이명호 경희대 교수, 이선옥 숙명여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 객원 에디터로 참여한 이경수 중앙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명호 교수는 “1990년대 문학의 핵심적 내용을 견인했던 것이 여성문학”이라며 “1990년대 들어 한국의 여성문학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니라 중심부로 진입했고, 더 이상 마이너리티(소수자)가 아니라 해도 좋을 만큼의 성취를 이뤄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