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출범한 1949년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는 형편없이 추락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6월 히틀러의 독일에 완패해 4년 넘게 나치 세력에 점령을 당했다가 1944년 말에야 미국·영국의 도움으로 국권을 되찾았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드골이 이끈 레지스탕스 덕분에 전승국 지위를 얻긴 했으나 예전과 같은 강대국 행세를 할 처지는 못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군을 대놓고 “약체”라고 부르며 무시했다. 자연히 나토는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고 프랑스와 기타 회원국들은 그 지휘를 받는 구조로 운영됐다.
드골은 이런 나토가 못내 불만스러웠다. 2차대전 직후엔 프랑스 국력이 워낙 약했기에 안보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자주국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여겼다. 1959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오른 드골은 먼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나토 의사결정 구조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드골은 그가 취임했을 당시 나토는 미국이 영국하고만 사전 협의를 거친 뒤 결정을 내리고 다른 회원국들에 지침을 하달하는 체계였다. “프랑스도 협의 대상에 끼워달라”는 드골의 요구는 미국 행정부에 의해 번번이 묵살당했다. 1966년 프랑스의 핵무장이 완성됐다고 여긴 드골은 마침내 나토 탈퇴를 발표했다. “프랑스 안보는 프랑스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당황했다. 당시만 해도 동서 냉전이 극심했다. 프랑스의 돌출행동은 나토와 서방 내부에 균열을 일으켜 소련(현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미국은 프랑스 파리에 있던 나토 본부를 황급히 벨기에 브뤼셀로 옮기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에 해가 됐다.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결국 나토에 복귀하는 결정을 내린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40년 넘게 나토 밖에 머물면서 프랑스의 리더십은 약화했다. 영국, 독일은 물론 국력 면에서 프랑스에 못 미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국가도 배출한 나토 사무총장이 프랑스에선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한때 나토가 싫다며 뛰쳐나간 나라 국민에게 나토 운영을 맡길 수 있겠느냐’ 하는 반감 때문일 것이다.
11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나토 정상회의가 열리는 가운데 ‘프랑스 리스크’가 다시 불거졌다. 최근 하원의원 총선거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프랑스가 정부 구성조차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군사지원에 앞장서 온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외교·국방 분야 정책을 소신있게 추진할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무기 제공이 줄어들거나 끊기면 그만큼 다른 나토 회원국의 부담이 커지고 이는 서방의 단결을 깨뜨릴 수 있다. 러시아로선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나토가 핵심 회원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정치적 위기라는 돌발변수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