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의 시간/ 커털린 커리코/ 조은영 옮김/ 까치/ 1만8000원
“커티,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요. 내일부터 전화에서 불이 날 테니까.”
헝가리 출신 과학자 커털린 커리코는 동료 드루 와이스먼과 2005년 면역학 학술지 ‘이뮤니티’에 논문 한 편을 투고했다. 논문이 나오기 전날 밤, 드루는 커리코에게 앞으로 강연 요청이 쏟아지고, 과학자·기자들에게 연구 결과를 설명하느라 바빠질 거라고 장담했다. ‘네이처’에서 한 번 게재 불가 판정을 받은 논문이었지만, 커리코 자신은 ‘전 세계가, 모든 학술지·생명공학 회사·연구기관이 주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논문이 나온 후 몇 년간 초대된 강연은 단 두 개에 불과했다.
이 논문에는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에 필요한 결정적 연구가 실려 있었다. 찬밥 신세였던 이 논문 덕분에 15년 후 화이자·모더나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는 1955년 헝가리에서 푸주한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흙집의 방 하나에 온 가족이 모여 살았다. 초등학생 때는 ‘그냥 괜찮은 정도 학생’이었다고 한다. 영재와 천재 친구들은 따로 있었다. 영어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배웠다. 공산 정권하의 헝가리는 척박했지만 연구환경은 훌륭했다. 그러나 제약회사의 연구비가 끊기는 바람에 1985년 어쩔 수 없이 미국행을 택했다. 외화 반출이 거의 금지된 터라, 딸의 곰인형에 900파운드를 몰래 넣어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박봉의 박사후연구원으로 첫발을 뗐다. 존스홉킨스대로 이직 기회가 왔다. 그를 고용했던 미국 생화학자 로버트 수하돌닉이 저주를 퍼부으며 화냈다. 미국을 떠나게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우여곡절 끝에 커리코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 의대에 연구 조교수로 자리 잡았다. 유펜 시절은 ‘불운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는 mRNA로 한 번도 연구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 공공·민간 모두에서 거절당했다. 5년간 조교수로 일하자 ‘부교수로 승진 아니면 퇴출’의 순간이 왔다. 승진에 실패했다. 나가는 대신 선임연구원으로의 강등을 택했다. 오십대가 될 때까지 그는 박사급 연구원 하나 없이 혼자서 실험을 다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 신경외과 과장은 그에게 툭하면 실험실 공간 비용만큼의 값어치를 하라고 닦달했다. 2005년 논문 출판 후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교수직 복귀를 요청했지만 인사팀에서 “교수 자격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 2013년에는 강제로 방을 빼는 수모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실험실 물품이 모두 복도에 내놓아져 있었다. 그는 “저 실험실은 언젠가 박물관이 될 것”이라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책의 진가는 이런 ‘노벨상 수상자의 극적인 실패기’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 과학자가 ‘치료용 mRNA’라는 꿈을 향해 묵묵히 정진한 과정, 그가 가진 연구 철학과 삶의 자세가 감동을 끌어낸다.
커리코는 과학에 대해 “앞서간 과학자들이 성취한 수천 가지 다른 발견들로 이뤄진 모자이크”라고 말한다. 모든 과학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대학을 떠나 독일 제약 스타트업 바이온텍에서 일한 그는 화이자·바이온텍의 백신 개발 주역이지만, 자신의 성과는 수많은 선행 연구자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여긴다.
그에 따르면 과학 실험은 고되고 느리다. 인내심을 갖고 ‘한 가지 더’라는 자세로 변수를 바꿔가며 기약 없이 미지의 땅으로 걸어가야 한다. 연구자의 삶을 포기할 이유는 많고, 포기해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과거 자신처럼 ‘무명의 삶’을 사는 후배들에게 “당신은 가능성이자 씨앗이니 멈추지 말아라”라고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