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퍼스트레이디와 영부인

“어 롱 롱 타임 어고(A long, long time ago)∼∼” 윤석열 대통령이 돈 매클린의 노래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불러 화제가 된 지난해 5월 26일 미국 백악관 만찬. 이 행사를 기획한 이는 퍼스트레이디 질 바이든 여사다. 사전에 미국 측에서 윤 대통령 부부가 좋아하는 곡을 물어와 5곡을 알려줬다고 한다. 브로드웨이 가수들이 이 노래들을 모두 부른 직후, 질 여사가 윤 대통령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윤 대통령이 몸을 뒤로 뺐으나 김건희 여사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나서더라는 게 참석자의 전언이다.

미국에서 퍼스트레이디의 권한이나 책임, 역할 등을 규정한 법률은 없다. 사실상 정규직 연방공무원 신분으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례가 있을 뿐이다. 백악관에는 웨스트윙 대통령 집무실이 있듯 퍼스트레이디를 위한 이스트윙 집무실이 별도로 있다. 비서실장과 대변인, 정책담당 직원, 비서관 등까지 두고 있다. 퍼스트레이디는 국내 행사와 해외 의전 행사에 참석하고 백악관 살림을 도맡아 처리한다. 만찬 행사 식사 메뉴에서 테이블 세팅, 무대 공연, 심지어 초청 대상자까지 모두 결정한다.



우리나라에선 내조형 대통령 부인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 활동도 이런 기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대통령 곁을 지키면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그런 상(像)이다. 대통령을 쫓아가서 팔짱을 끼는 것조차 입방아에 올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언행이 톡톡 튀고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김건희 여사의 이미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난해 윤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 답례 문화공연을 준비할 때 김 여사 안목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국민의힘 7·23 전당대회 대표 경선이 이전투구로 흐르면서 잠잠했던 김 여사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1월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에게 보냈다는 텔레그램 메시지에 이어 4·10 총선 직후 시사평론가와 57분간 통화한 사실까지 공개됐다. 모두 부적절한 처신이다. 미국에선 퍼스트레이디 활동에 관한 공직 지위를 부여하되 모든 활동을 투명하게 공개한다. 우리도 이제 ‘영부인 사용설명서’를 정식으로 마련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