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밀 미사일의 독일 배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독일이 동서로 분단돼 있던 1976년 소련(현 러시아)은 동독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SS-20을 배치했다. 당시는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진영 간 냉전이 극에 달한 때였다.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SS-20의 동독 배치는 서독은 물론 서유럽 전체의 안보를 위협하는 조치였다. SS-20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서독 정부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긴급히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나섰다.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1974∼1982년 재임). 독일 국가기록원

당시 서독 집권당은 서방 못지않게 소련과의 관계도 중시했던 좌파 성향 사회민주당(SPD)이었다. 당연히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소련과 외교 협상에 나섰다. 그러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SS-20에 맞설 강력한 무기의 서독 배치도 검토했다. 역시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퍼싱-2가 그것이다. 슈미트는 ‘외교가 우선이지만 협상이 결렬되거나 지지부진하면 안보를 위해 서독에 퍼싱-2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SPD 지지층은 물론이고 서독 국민 상당수가 비핵화를 주장하며 퍼싱-2 배치에 반대 의사를 표한 점이다. 소련이 SS-20 철수 요청을 끝내 거부하자 슈미트는 1980년 결단을 내린다. 이후 ‘반전’과 ‘반핵’, ‘평화’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서독 전역을 뒤덮은 가운데 독일 내 미군 기지에 퍼싱-2가 배치됐다. 유권자들은 SPD에 등을 돌렸다. 그때까지 SPD와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자유민주당도 연정 파기를 선언했다. 슈미트는 1982년 10월 의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며 총리직을 잃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서독은 안보를 지킬 수 있었다. 이는 1990년 서독 주도의 독일 통일이 이뤄지는 토대가 되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1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미국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독일에 미군의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해당 무기는 SM-6 함대공 미사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개발 중인 극초음속 미사일 등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11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다양한 무기체계를 고려할 때 우리에게 정밀 미사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독일 국내에선 벌써부터 “군비경쟁만 부추길 것” “더 큰 위험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 등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마침 숄츠는 40여년 전의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SPD 소속이다. 슈미트처럼 지지층의 반대도 무릅쓸 각오를 한 숄츠의 정치적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