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 전성태 “질문 멈추지 않고 삶의 형식인 듯 글 계속 쓰겠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작고한 대구 출신의 사진작가 이지누는 남해 완도의 청산도를 비롯해 길 위에서 만나는 순정한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사진작가 서원 등과 함께 깊이 있는 취재를 바탕으로 사진을 주요한 콘텐츠로 담은 계간지 『디새집』를 발간하기도 했다.

 

『디새집』의 이지누와 서원 작가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삶을 한국의 얼이라고 생각하면서 글과 사진을 통해서 이를 기억하고 보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잡지는 우여곡절 끝에 폐간됐고, 서 작가는 안타깝게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들과 함께 청산도를 다니기도 했던 소설가 전성태는 어느 날 잡지 『보보담』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 작가가 『디새집』 폐간 이후 『보보담』 발행을 총괄하고 있었다. 중앙대에서 강의 중이던 그는, 10주기를 맞는 서 작가를 추억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마침 수강생 가운데 섬에 찾아가 몇 달 동안 텐트를 쳐놓고 생활하는 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학생의 모습은 마치 전망이 부재하고 답답한 현대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자연스럽게 청산도의 서 작가와 텐트를 친 학생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포개졌다.

 

소설가 전성태는 사진작가 서원씨와 섬의 수강생 이야기를 버무려 단편소설 「여기는 괜찮아요」를 창작, 잡지 『보보담』 2020년 여름호에 발표했다. 단편소설 「여기에 괜찮아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람과 인연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나는 약국에서 받은 문자를 까맣게 잊은 채 귀갓길에 올랐다. 약국을 나와서 근린공원을 가로지르다가 마침내 문자 생각이 났다. ‘김원보씨, 전화 부탁드립니다. 완도 오동순 드림’ 나는 발걸음을 세웠다. 내게 온 전화가 아니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그럼에도 그 전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김원보는 내가 아는 선배의 이름이었다. 나는 오동순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 오동순이라는 이는 대체 왜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걸까?”(264쪽)

 

대학교수인 ‘나’는 팬데믹 시기 비대면 강의를 하면서 섬에서 혼자 지내는 수강생 경진의 글쓰기 과제를 첨삭한다. 어느 날 청산도에서 만났던 공무원 어르신 오동순씨로부터 기억에 없는 책을 돌려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오씨와 통화한 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 청산도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던 원보 형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평생 상여 앞소리꾼으로 산 노인 이야기도. 내가 마침내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 묻자, 그들은 “아직 여그는 청청한게” “여기도 괜찮아요”라고 화답한다.

 

“‘상여 소리꾼 어르신 말이에요. 어떻게 되셨어요?’ ‘기억하시네요이? 양동섭 어르신 가신 지 한 7년 됐으니까. 우리 백부는 아직 살아 계시고요. 백세 넘겨 사실 양반을 어찌 이게불겄다고 그런 약속을 하셔. 그냥 우스워 죽지라. 전 선생, 내 월급 나올 때 완도에 한번 놀러 오쇼. 아직 여그는 청청한게.’ 나는 그렇겠노라고 약속했다. 경진 학생에게서 짧은 메일이 왔다. ‘여기도 괜찮아요, 교수님. 할머니 돕다가 다음 학기에 올라가려고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바람 좀 쐬게 오만원만 보내주세요. 양경숙씨한테서 받으면 갚을게요. 계좌는 수협이고요 ㅠㅠ’”(275쪽)

 

따뜻한 시선과 풍성한 토속어로 향토적인 생명력을 발산해온 소설가 전성태가 표제작 「여기는 괜찮아요」를 비롯해 최근 발표한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9년만의 소설집으로, 그의 다섯 번째 소설집.

 

이번 소설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비롯해 비교적 최근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금강산에서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일흔이 넘은 노인(「상봉」), 오래 전 함께 했던 형을 기억으로 만나는 대학교수(「여기는 괜찮아요」), 아버지를 보내고 오는 딸과 의붓어머니(「숲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따라가 애도의 방식을 고민하는 중년의 딸(「가족 버스」) 등등. 향토색 짙은 언어로 토속과 세속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 향토적인 생명력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온다.

 

작가 전성태가 소설을 통해서 만나고 떠나보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이들일까. 향토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전 작가를 지난달 20일 전화로 만났다.

 

“깡통은 오늘의 네르귀를 있게 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표제어 ‘깡통’, 몽골어로 ‘라아즈’를 논의할 때는 지난해 연말이었고, 연구원들은 오늘처럼 네르귀의 이야기에 빠져 한나절을 보냈다.”(15쪽)

 

소설집의 문을 여는 「깡통」은 대학부설 연구소에서 한몽사전 편찬 작업을 하러온 몽골 사람 네르귀의 이야기다. 네르귀는 표제어 깡통을 다루다가 어릴 시절 깡통에 얽힌 추억을 회고하게 된다. 그러니까 네르귀는 부모들이 돈 벌러 한국으로 가면서 할아버지와 둘만 남게 된다. 어느 날 여행자들에게서 콜라캔을 선물 받았다가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위험한 깡통을 버리러 멀리 떠나게 되는데.

 

―“고비의 방식”이라는 말이 인상적인 「깡통」은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5년 가을에서 2006년 봄까지 6개월간 몽골에 머문 적이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9번이나 몽골을 다녀왔다. 지평선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체험, 이곳에서도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과 인생들.... 몽골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쓴 것이 세 번째 소설집 『늑대』였다. 그때 몽골에 대해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 하나를 더 쓰고 싶어서 쓰게 됐다. 특별한 모델이 있는 건 아니다. 몽골 고비 사막에 가면, 가끔 할아버지나 할머니하고만 지내는 어린 애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엄마가 돌아가 이모 집에 어린 딸들을 맡겨 놓은 집을 아이의 아빠와 함께 찾아간 적도 있었다. 몽골은 썩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우리 사회가 유목사회인 몽골이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를 느꼈다. 유목사회는 자연에 더 가까운 사고, 야생적 사고들이어서 어떤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것들을 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좀 냉정하게 보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한국으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또다른 세계도 전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유목사회 문화가 농경사회 문화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2017년작 「합석」은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배우는 세 여성이 노벨문학상 발표 시즌을 맞아 편의점에 앉아 맥주를 마시게 되고, 여기에 홍 시인과 역시 시를 공부하는 미얀마 로힝야족 사람까지 합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제가 작품을 쓸 때는 미얀마 로힝야족 문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작가회의의 국제연대 활동과 관련해 로힝야족 이야기를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로힝야족 문제를 알리고 싶었다. 한편으론 시 한 줄 읽지 않는 이들이 노벨문학상 발표 시즌만 되면 무슨 스포츠 선수 응원하듯이 환호하는데, 상보다 문학 자체가 가지는 어떤 역할이나 힘, 연대의 힘을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

 

소설 「조용한 생활」은 고교 시절을 보낸 곳의 대학 교수로 돌아온 준모의 이야기다. 어느 날, 준모는 주인집 허 노인으로부터 여순사건 희생자의 학적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는 학적부에 전화를 했다가 고교 시절 유일한 친구 양태민과 보낸 어두웠던 학창시절을 되짚게 되는데.

 

―여순 사건의 심연으로 곧 육박해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인데.

 

“대학교 안에 여순사건을 연구하는 ‘119연구소’가 있는데, 운영위원을 맡아서 하나씩 배우고 있다. 여순 사건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가 다닌 고교 근처에서 사건과 관련해 유해 발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선교사 기록 등도 남아 있었지만, 유해가 발굴되진 않았다. 주민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아마 유가족들이 당시는 아니더라도 나중에 시신을 하나 둘 찾아가지 않았겠느냐 라고 하더라. 지금 살고 있는 주인집 어르신이 2022년 가을 무렵 작품 속의 내용과 비슷한 것을 요청하신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자료를 찾진 못했다. 주인이 쪽지를 전했을 때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폭력적인 것에 노출돼 있는 시간과, 순천이라는 공간을 연결해 그려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여순 사건을 다룬 첫 작품인지) 그렇다. 앞으로 이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다. 여순 사건의 공간에 들어가 사건의 실체를 복원해내는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다섯 번째 소설집인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 묶기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작가로서 기운이 빠져 있기도 하고, 쓰는 재미도 많이 잃었던 시간 같다. 빨리 묶어야겠다는 욕심도 없었고, 묶고 나서도 뿌듯한 기분 없이 긴 시간을 정리했구나, 하는 마음이 앞섰다. 이 기간 어머니 아버지 큰형 가족 세 사람을 잃기도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대답은 그가 「작가의 말」에서 “소설집을 묶으며 자꾸 무엇인가에 진 느낌이 든다. 생활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으며 두렵게도 문학일 수도 있다” “오랜만에 묶는 소설집이라 편편이 한데로 뭉치는 느낌보다 여러 무늬로 흩어진 감이 있다” “정면을 응시하지 못한 부끄럼이 찜찜하게 남아 있다”고 말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햇살이 피부를 따뜻하게 간질이던 어느 봄날, 고흥 도덕초등학교 앞 담장 밑에 ‘햇님문고’라는 80권짜리 전집이 쭉 진열돼 있었다. 책 옆에는 현미경과 몇 가지 경품도 함께 놓여 있었다. 책을 팔러온 아저씨는 책을 사면 현미경과 경품을 주겠다고 말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소년은 현미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꿈이 우주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얼마 뒤, 전집이 담긴 박스들이 집에 들어왔다. 소년은 막 직장에 취직한 둘째 형에게 책을 읽고 싶다고 거짓으로 편지를 썼고, 둘째형은 자신의 월급 절반을 털어 전집을 사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한동안 전집을 열어보지 않고 장난감 같은 현미경만 갖고 놀았다.

 

며칠 만에 현미경에 싫증이 났다. 우연히 몸을 돌리자, 책 박스가 여전히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책 박스를 열었다. 박스의 제일 위에 『수호전』이 들어 있었다. 책을 꺼내 들고 읽어 내려갔다.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가 펼쳐졌다. 초등학교 4학년 전성태가 처음으로 이야기 세계에 강렬하게 빠져든 순간이었다.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은 그는 2학기 때 여교사의 손에 이끌려 주산반에서 문예반으로 옮겼다. 선생은 그에게 여러 백일장에 참가하도록 권했고, 가끔 맛있는 짜장면도 사주었다. 이때부터 혼자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중학 시절의 또다른 교사는 그에게 아침에 친구들이 읽을 수 있도록 칠판에 시 한 편씩 필사하도록 시키는 한편, 방학 때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양철북』, 『모비딕』 같은 책들을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문학의 세계로 한발 더 깊게 들어갔다.

 

글쓰기는 어느 순간 동화에서 소설로 넘어갔다. 고교 1, 2학년 시절, 그는 자취방에서 소설을 썼다. 신나게 썼다. 무려 20편 이상을 썼다. 물론 주위 사람들과 돌려본 것은 아니었고, 교지에만 조용히 발표했을 뿐이다. 이 시기 일기도 많이 썼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글쓰기의 매력에 푹 빠져든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대학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집단 창작을 하는 곳에서 활동했다. 고교 때 가졌던 감상적인 문학관을 버리고 문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고 순천에서 유학한 전성태는 대학 3학년 시절인 1994년 농촌 젊은이의 모습을 해학적인 필치로 그린 단편소설 「닭몰이」로 실천문학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을 발표했다.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작품 세계를 설명해 준다면.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의 세계가 있겠지만, 저는 작가가 나이 들어가면서 사는 만큼 소설로 옮겨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을 소설로 옮겨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자전적인 이야기도 많이 쓰는 편이다. (특별히 아끼는 작품은) 독자들은 상도 받고 화제가 된 세 번째 소설집 『늑대』를 저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 개인적으론 『늑대』보다는 『두 번의 자화상』이 더 애정이 간다. 다뤄보고 싶은 세계가 나름대로 잘 풀렸고 잘 다뤄진 것 같다. 개인에게 다가와 있거나 감각할 수 있는 역사나 사회나 역사 문제가 잘 다뤄진 것 같다.”

 

이와 관련, 문학평론가 고영직은 전성태에 대해 “김유정과 채만식, 이문구의 문체를 이어받은 후예”라고 평하기도 했다.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일단은 작가 개인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작가에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써야 한다. 해결이 되든 아니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든, 작가는 지금 당도한 질문, 문제를 소설 쓰기를 통해서 탐색하고 호흡해야 한다. 이것이 소설에서 우선적으로 실현돼야 한다. 다음으로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이 사회적 성찰로 연결돼야 한다. 한 개인이 감각하는 사회나 역사, 또는 집단 문제 등이 소설 안에 함께 묻어가야 한다. 개인적 지평과 사회적 지평이 파열되거나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들을 늘 탐색하고 잡아내려 한다.”

 

―차기작 계획은. 작가 또는 작품에 대한 비전은 어떤가.

 

“스물다섯에 작가가 처음 됐을 때는 결국 단 한 편의 작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 생활을 30년째 해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작가란 단 한 편을 남기는 과정이 아니고, 중간에 실패 같은 것을 해가며 작품을 쓰면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인생을 살아가는 결과로서 한 편씩 소설이 나오는 것이지, 단 한 편을 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소설 쓰기가 제 삶의 형식인 것처럼, 오랫동안 질문을 멈추지 않고, 살아가듯 계속 글을 쓰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다만, 요즘은 단편 쓰는 재미가 덜한 것 같아서 앞으로 몇 년간은 장편 작업을 주로 하고 싶다.”

 

요즘 자꾸 ‘무엇인가에 진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소설가 전성태는 삶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새벽 5시 일어나서 수업 준비를 하고, 집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 가서 걷고, 학교에 나가서 수업하거나 공부하고. 수업하는 것도 좋고, 지금 이 순간 이 공기 안에 있는 것도 좋다. 틈틈이 걸으며 생각하고 희구할 것이다. 아직 “못다 쓴 이야기, 꼭 쓰고 싶은 소설”을.

 

예전에는 존경하는 ‘선생님’들도 활동하고 계셨고 글쓰기 친구들도 옆에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홀로 걷는 감각이 도저하다. 선생님이나 선후배 작가들이 하나둘 떠날 때마다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 가족이 떠나가는 듯한 통증 역시. 혼자 걷는 감각으로 글을 써 가리라. 몽골의 친구 네르귀가 할아버지를 떠나서 비로소 세상으로 걸어 나온 것처럼.

 

“네르귀는 엔비쉬 할아버지가 있는 고비로 돌아가지 않았다. 깡통을 싸주며 네르귀를 먼 길로 떠나보낼 때, 그는 그만의 길을 떠났으리라는 게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그게 고비의 방식이라고 네르귀는 동료 연구원들에게 말했다.”(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