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30일 고중석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여러 언론 매체가 고인이 1996년 사형제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사건에서 합헌 의견을 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부고 기사를 작성했다. 그런데 고인이 재판관으로서 관여한 사안들 가운데 사회적 파장이 정말 컸던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김영삼(YS)정부 시절인 1995년 12월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제기된 위헌법률심판 제청이다. YS가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직접 여당에 지시해 만들어진 법률인 만큼 이게 위헌 결정을 받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5·18 특별법의 핵심은 공소시효 연장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로부터 3개월가량 지난 8월16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전두환 정권 탄생이 완성된다. 민주화 이후 12·12와 5·18을 ‘내란’으로 규정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해 YS정부 시절 극에 달했다. 문제는 형법상 내란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란 점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최 대통령 하야로부터 꼭 15년이 지난 1995년 8월15일 공소시효가 끝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5·18 특별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하여는 1993년 2월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라는 취지로 규정했다. YS정부 출범일(1993년 2월25일) 이전은 신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이 집권한 군사정권 시기였던 만큼 수사와 기소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특정인들의 형사처벌을 위해 국가가 임의로 공소시효를 늘린다? 법조인들, 심지어 판사들조차 ‘헌법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고 12·12 가담자 일부가 헌법소원을 내면서 결국 헌재가 합헌인지 위헌인지 심사에 돌입했다. 1996년 2월16일 헌재는 재판관 4(합헌) 대 5(위헌) 의견으로 5·18 특별법을 합헌으로 결정한다. 위헌 의견이 더 많았지만 합헌이 선고된 것은 위헌 결정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 소개한 고중석 재판관은 위헌 의견을 냈다. 전남 담양 출신으로 호남의 명문 광주고를 나온 그가 5·18 특별법을 반대한 것은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져 화제가 됐다.
헌재의 합헌 결정이 있기 전 검찰은 12·12 가담자 및 5·18 유혈진압 책임자들의 처벌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꼭 29년 전인 1995년 7월18일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는 내란 혐의로 고발된 전 전 대통령 등에 대해 “신군부 세력의 새로운 정권 창출과 직접 연관된 5·18 사건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여기서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것 아니나”며 검찰을 비난하는 여론이 시민과 대학생들 사이에 비등했다. 검찰을 규탄하고 정부를 성토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을 휩쓸자 YS가 내린 결단이 바로 5·18 특별법 제정이었다. 헌재가 이 법률에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논리는 완전히 무너지고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