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고전으로 생명력이 긴 예술작품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와 세대, 국경을 초월해 울림이 크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창작 고통에 시달리는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400여년 전 작품인 셰익스피어 ‘햄릿’도 그중 하나다. 온갖 군상과 관계를 통해 인간 본성과 부질없는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한 ‘햄릿’은 여전히 전 세계 무대에 자주 오른다. 창작진에 따라 색다른 ‘햄릿’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2016년과 2022년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시즌인 신시컴퍼니 ‘햄릿’(연출 손진책, 각색 배삼식)과 2021년 제작됐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이제야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는 국립극단 ‘햄릿’(연출·윤색 부새롬, 각색 정진새)이 그렇다. 10월엔 예술의전당이 ‘햄릿’(연출 신유청, 각색 황정은)을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세대 아우른 호화 출연진의 ‘정통 햄릿’
“광대든 단역이든 참여하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손숙, 배우2 역)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연극이고, 특히 햄릿 역은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역할인데 처음 하게 돼 기쁩니다. 특히 이런 분들과 한 무대에 같이 선다는 게 큰 영광이에요.”(이승주, 햄릿 역)
지난달 9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신시컴퍼니 연극 ‘햄릿’에 출연하는 손숙(80)과 이승주(43)의 소감이다.
이번 공연은 국내에서 ‘햄릿’을 처음 선보인 이해랑(1916∼1989) 탄생 100주년이던 2016년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9명이 출연한 초연과 강필석(햄릿 역), 박지연(오필리어 역) 등 젊은 배우가 가세한 2022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다. 이번에도 배역과 상관없이 어떤 무대에 서든 존재감이 대단한 호화 출연진을 자랑한다.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배우만 해도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김재건, 정동환, 김성녀, 손봉숙, 남명렬, 박지일, 길해연 11명에 달한다.
손진책 연출은 공연 전 기자들과 만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은 예술 밖에 없다”며 “세 번째 시즌인데 초연은 9명 배우에 대한 오마주(존경의 뜻)로, 재연은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내면에 각각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산 채로 죽어 있는, 죽은 채로 산 듯한 사령(死靈)들의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진실을 묵살하고 비겁하게 사는 것은 산다고 해도 죽은 것이란 쪽으로 ‘햄릿’을 펼쳐보이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그전 무대와 상당히 달라졌다. 예컨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뇌하는 햄릿이 아니라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는 법을”이라고 일갈하는 햄릿을 만날 수 있다. 이중 거울을 벽처럼 세워 햄릿의 분열적 모습과 등장인물 간 감시의 눈초리 등 각양각색 모습이 드러나거나 감추어지게 한 무대 연출도 돋보인다. 연극 시작과 끝에 등장인물 모두가 의자를 들고 나와 몽환적 상태에서 같은 동작을 하는 장면은 ‘삶이 연극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야기 줄기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 말맛과 리듬을 잘 살린 배삼식 작가 글솜씨 덕에 ‘햄릿’의 주옥 같은 대사가 쏙쏙 귀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한국 연극계의 전설적 원로와 중추, 미래인 배우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힘이 대단하다.
동생에게 독살 당하고 왕좌와 왕비를 뺏긴 선왕(유령) 역의 이호재·전무송(83)부터 가엾은 오필리어 역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하는 걸그룹 에프엑스 출신 루나(31)까지 세대를 아우른 24명 배우의 호흡이 절묘하다. 재연 때 혼자 햄릿 역을 도맡았던 강필석과 첫 도전인 이승주의 햄릿 등 더블 캐스트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도 크다. 원작에 없는 독백이 추가되는 등 비중이 적잖은 오필리어 역을 공연 내내 혼자 소화하는 루나 연기는 기대 이상이다.
‘햄릿’ 공연 수익금 일부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과 차범석(1924∼2006) 탄생 100주년을 맞은 차범석연극재단에 기부돼 연극인 복지 환경 개선과 창작희곡 발굴에 쓰인다. 공연은 9월 1일까지.
◆왕권에 집착하는 공주가 된 ‘변형 햄릿’
국립극단이 창단 70주년(2020년) 기념작으로 준비한 ‘햄릿’은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 여파로 이듬해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에만 공개됐다. 그럼에도 평단·관객 호평과 재공연 요청에 따라 3년 8개월 만인 지난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등장인물 성별을 바꾸고 그에 맞춰 내용도 새로 손질한 젠더 벤딩(Gender Bending) 작품이다. 햄릿을 공주로 설정하면서 연인 오필리어는 남성, 가까운 친구 호레이쇼는 여성으로 바뀌는 식이다. 부새롬 연출과 정진새 작가가 ‘이 시대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햄릿’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맨 결과다.
극 중 햄릿 공주는 검투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으로 원작과 달리 왕권을 차지하려고 고군분투한다. 호레이쇼에게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이처럼 국립극단 ‘햄릿’은 원작의 가족 내 복수극과 달리 권력 암투극 성격이 짙다. 정진새 작가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원작에선 햄릿이 어떤 왕이 되고자 하는지가 안 나온다”며 “정복 전쟁을 통해 나라를 통치한 선왕과 달리 해군 장교까지 역임하며 국가 시스템을 이해하고 다른 이상을 품은 햄릿 공주를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을 당시 만연한 여성 비하나 혐오가 담긴 대사는 지금 시대와 맞지 않아 들어내거나 다듬었다. 일례로 왕권을 차지한 숙부와 곧장 결혼한 어머니를 비난하며 “온갖 저속한 것들만 우글거리는구나.…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라고 한 햄릿 대사는 “약한 자의 자리는 항상 악한 자한테 빼앗기지.…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로 다듬었다. 선왕의 죽음 등 주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조사위원회가 권력의 입맛에 맞는 조사결과만 내놓는 장면에선 우리 사회의 단면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햄릿 공주’를 맡은 배우 이봉련(43)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캐스팅했다”는 부새롬 연출의 판단이 맞았음을 입증한다. ‘봉련 햄릿’이라 불릴 정도다. 이 작품으로 2021년 백상연기대상 연극 부문 여자 연기상도 받은 이봉련은 “여성 배우에게 햄릿 역할이 올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 않기에 제 인생에 ‘햄릿’을 만난 건 천운 같다”며 “‘햄릿은 이래야 한다’, ‘주인공은 어때야 한다’는 스스로의 편견을 계속 깨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생각한 정의를 실현하려다 (왕권 획득을 위한) 더 큰 욕망에 잠식당한 채 잘못된 길에 들어 죽음을 맞는 햄릿을 찾아가고(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만 ‘남자 오필리어’가 이질적으로 다가오고 존재감이 약한 게 아쉽다. 공연 내내 물을 활용한 무대 연출도 감각적이긴 하나 작품이 전하고자 한 의미에 비춰 크게 와닿지 않는 편이다. 물속을 첨벙거리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연기해야 해 힘들 법한데도 이봉련과 김수현(클로디어스 역), 김용준(폴로니어스 역) 등 배우들은 열연을 펼친다. 공연은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