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정이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있다. 4·10 총선에서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자고 나면 포퓰리즘 성격이 짙은 법안을 쏟아내고 검사도 모자라 대통령 탄핵까지 겁박한다. 정부 정책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공수표로 전락하기 일쑤고 여당은 자중지란에 허덕인다. 경제도 위태롭다.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인구위기는 국가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악화일로다. 다락같이 오른 물가에 서민 살림살이는 팍팍하고 자영업자·소상공인 시름도 깊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성균관대 이사장)은 “현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여러 측면에서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의 혼란상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박 이사장은 “당시 한보와 기아차 부도사태로 경제충격이 컸는데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렸다”며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과 한국은행도 은행감독원을 둘러싼 내분이 심각했다”고 했다. 결국 그해 가을 결정적인 난국에 처한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강제적인 4대 부문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이사장은 “지금 외환위기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만 긴 호흡에서 다시 한 번 개혁해야 하는 위기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세계적으로 봐도 어려울 때 개혁이 성공한 사례가 많다. 그는 “1990년대 초 복지 천국이던 스웨덴은 재정금융위기를 맞아 재정·복지·교육·의료 부문을 시장 친화적으로 개혁해 정상적인 성장궤도로 복귀했다”고 했다. 이어 “독일도 통일 후 10년 가까이 몸살을 앓아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는데 2002년 하르츠 개혁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켰고 영국은 197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개혁조치로 ‘영국병’을 치유했다”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나라가 망가졌다가 기사회생해 정상궤도로 복원하면 다행이지만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와 같은 중남미국가처럼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사례도 꽤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18일 서울 성균관대 이사장실에서 진행됐다.
―4·10 총선 이후 여야 간 대립이 첨예하고 국정표류도 심각해 보인다.
―민주당은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개정안 등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부작용을 우려하는 지적이 많다.
“(야당이 추진하는 법안들은)기여와 보상이 부합하지 않는 불공정한 시스템을 강제하는 게 가장 걱정스럽다. 개인이 기여한 것과 되돌려받는 보상이 비례하는 방향으로 가야 누구든지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걸 시도한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한다. 열심히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별 차이가 없으면 도덕적 해이가 심화하고 일할 요인도 약화한다. 야당 법안들은 대체로 천문학적인 재정이 소요되는데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국가가 내 삶을 책임져달라는 데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오는 전체주의 사고가 깔려 있다. 국민의 자조 의식, 자기 책임원칙이 훼손되기 때문에 사회가 뒷걸음질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법은 막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 예산 심의 때 일정 정도 타협이나 절충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책이 너무 오염되고 시스템이 훼손되지 않도록 공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 전문가와 지식인, 싱크탱크, 언론이 목소리를 내다 보면 야당도 부담을 느낄 거다. 그런데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보면 정말 실망스럽다. 여당이 야당의 정책을 비판, 순화하거나 공격할 소재가 널려 있는데 제 일을 못 하고 폭로와 비방전 등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종합부동산세·상속세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1986년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조세개혁 이후 감세는 세계적 추세다. 인력이나 자본, 기술이 장벽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우리도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 법인세·부동산세·상속세 부담이 선진국 평균보다 높고, 세율 구간도 지나치게 다단계 누진 구조라 완화하는 게 맞다. 현 세제는 경제 활동 유인을 억누르고 자원배분도 왜곡한다. 금투세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라는 원칙에 부합하지만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다. 2025년 시행될 법은 펀드가 빠지고 개인 투자자에게만 해당돼 반론이 나오고 자본시장 밸류업 기조와도 상충한다. 투자자가 해외로 이탈하거나 단기매매만 촉발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대만도 1980년대 후반 이 제도를 도입했다가 증시가 폭락하자 없던 일이 됐다.”
―현 경제 상황은 어떤가.
“반도체 경기 반등 덕에 수출 개선세가 뚜렷하나, 고금리·고물가 여진으로 내수는 지지부진하다. 금리가 내려가고 수출이 양호한 흐름을 이어가면, 기업 투자 확대 등으로 내수도 차츰 회복되겠으나 그 속도는 완만할 전망이다. 더 큰 문제는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와 1인 가구 급증 등 인구위험이 가속화되고 있고 탐구·모험·창의 등 혁신역량의 정체, 사회갈등 고조와 자조 의식 퇴색, 기여와 보상이 따로 노는 불공정한 시스템 확산 등 구조적 문제가 수두룩하다.”
―윤석열정부도 교육·연금·노동 등 구조개혁을 공언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는 듯하다.
“구조개혁은 이해관계가 첨예한 만큼 고통·저항·금단 현상이 따르고 시간이 걸린다. 윤 정부는 청사진과 단계적 실행계획을 내놓고 공감대를 넓히면서 합의를 모색하는 ‘슬기로운 일머리(statecraft)’가 미흡했다. 교육 개혁은 정체된 인적 역량을 높여 신산업 태동과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는 것이고 연금·노동개혁은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하나같이 절실하지만, 국민연금은 저출생·고령화로 갈수록 기득권층이 늘어가기 때문에 개혁이 시급하다. 지난 5월 더 내고 덜 받는 모수개혁이 좌초된 건 아쉽지만 22대 국회에서 불씨를 살려야 한다. 국민연금은 소득비례방식으로 개편하고 기초연금은 대상자를 축소하고 노후 소득에 따라 차등화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현 노동법제도와 관행은 대기업·정규직·노조원에 유리하고 중소기업·비정규직·비노조원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기재부 장관 시절 불필요한 복지확대를 반대한 것으로 아는데 현 복지 수준을 평가한다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복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참여세율’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100%를 웃돈다. 이 지표는 복지수혜자가 일해서 소득을 올리면 그에 따른 복지 혜택축소·세금 등을 부담하는 실효세율을 뜻한다. 100%를 넘어서면 복지수혜자가 일하지 않고 ‘복지함정’에 안주할 소지가 다분하다. 현실적으로 이미 시행한 정책을 뒤로 되돌리기는 힘든 만큼 예산증가율 대비 낮게 인상하거나 동결해야 한다. 더는 새로운 걸 만들어선 안 되며 복지지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조금이라도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사람(근로 빈곤층)을 도와주는 ‘일하는 복지(워크 페어=work+welfare)’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가 5월 초 저출생종합대책을 내놓았는데 출생률 반전이 가능할까.
“대책이 수요자 중심이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경제적 유인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가족에 관한 인식개선이 절실하다. 인간은 교육과 일·여가, 혼인·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백인 가장 가구 순자산은 흑인 가구보다 8배 많지만 백인 1인 가구 순자산은 흑인 유배우 가구의 절반에 불과하다. 가족이 근로 의욕이나 저축 동기, 자조 의식의 원천이라는 방증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경제적 준비가 되지 않아 결혼하기 어렵다기보다는 결혼해서 자립하자는 인식이 퍼졌으면 좋겠다. 가부장제 등 낡은 문화와 관습을 청산해 부부가 가사·육아 부담을 나눠야 한다.”
―소상공인·자영업자는 우리 경제의 취약한 고리인데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지금까지 대책은 ‘새출발’ 기금, 만기 연장·상환 유예, 대환대출, 신용사면 등이 있다. 이 중 일부는 성실 차주를 역차별하고 도덕적 해이 논란을 빚고 있다. 고통 없는 묘약은 없다. 옥석을 가리지 않는 지원은 자기 책임원칙을 훼손하고 자영업생태계를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달 초 발표된 ‘새출발 희망 프로젝트’가 작동하려면, 자영업자 실태를 먼저 제대로 파악하고 생계형·사업가형, 상환 여력에 따른 맞춤형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근본 해법은 금리를 웃도는 성장률 달성인데 생산성 향상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에 힘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