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미테리 사건’ 계기로 안보 법규 강화해야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기밀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1996년 9월 FBI에 체포되어 8년 가까이 수감되었다. 그는 2005년 11월 방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는 스파이가 아니라 조국의 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대가 없이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었다”면서 “미국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7월16일 역시 한국계인 CIA 출신 수미 테리가 미 연방 검찰에 의해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버트 김의 죄목은 ‘간첩 음모’였는데, 수미 테리에게는 ‘외국대리인등록법’이 적용되었다. 이 법은 간첩죄로 처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파렴치 행위, 허가 없이 외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행위, 외국 정부와 단순 연락·접촉하는 행위까지 처벌한다.

채성준 서경대학교 군사학과장·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이번 사건을 두고 한·미관계에 미칠 파장이나 정보활동 위축을 우려하는 시각과 국정원의 치밀하지 못한 처신에 대한 논란이 대두되고 있다. 타당한 지적이지만 차제에 미국의 안보 관련 법체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일반적인 정보수집과 누설, 공개 행위까지 간첩행위로 포괄하는 형법 외에도 특별법 형태로 간첩법, 외국대리인등록법, 외국정보감시법 등을 두고 모든 스파이 활동에 용이하게 대처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독일은 ‘형법’, 일본은 ‘특정비밀보호법’, 중국은 ‘반간첩법’ 등에서 외국의 간첩행위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현행 안보 관련 법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져 북한 및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단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국을 적국이나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지 않는 한 사법 조치할 수 없다. 이는 유사 사례 발생 시 상호주의 차원에서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2006년 10월 국회 문광위 국감장에서 당시 경인방송 신현덕 공동대표가 “방송사 대주주인 백성학 (주)영안모자 회장 지시로 국내 정치 상황 및 북한 관련 예민한 정보가 담긴 문건들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국회에서 위증’ 등 혐의로 종결되었던 전례가 있다. 지난해 2월 발생한 중국 비밀경찰서 사건에서도 처벌 법규가 없어 조사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미국 CIA의 용산 대통령실 불법감청 사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이다. 2023년 말 기준 체류 외국인은 250만여 명에 달한다. 국제질서는 탈냉전 이후 다극화되고 국제관계에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미·중 갈등으로 촉발된 신냉전 시대 도래와 함께 동북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구도가 조성되면서 정보전쟁 또한 치열하다. 중국은 글로벌 차원의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을 펼치면서 단순히 군사기밀이나 산업기밀을 넘어서 전방위적인 스파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 등이 간첩법을 발의하였으며, 당시 한동훈 법무장관 역시 간첩죄의 범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형법 개정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최근 ‘수미 테리 사건’을 계기로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박선원 의원이 같은 의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번 기회에 한국판 ‘외국대리인등록법’ 제정을 포함해 안보 관련 법규를 국제사회에서 우리 위상에 맞게 손질하는 데 여야가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채성준 서경대학교 군사학과장·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