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도 대표팀 허미미(21·경북체육회)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유도 선수였던 아버지를 동경해 도복을 입고 엘리트 선수의 길로 들어선 허미미는 중학교 3학년이던 2017년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 여자 52㎏급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명문대인 일본 와세다대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진학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운동과 학업 모두 탄탄대로를 달리던 2021년, 허미미가 유독 잘 따랐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유언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중국적이었던 허미미는 한국 국적을 택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같은 재일교포 김지수(23)를 따라 경북체육회 유도팀에 입단했다.
입단 과정에서 자신이 독립운동가인 허석(1857∼1920) 선생의 5대손임을 알게 됐다. 김정훈 경북체육회 감독이 선수 등록을 위해 허미미의 본적지인 군위군에 방문했다가 관계자로부터 허미미가 허석 선생의 후손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김 감독이 지역 면사무소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가족관계를 조사한 결과, 허미미의 할아버지인 허무부씨가 독립운동가 허석 의사의 증손자라는 것이 확인됐다. 허석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격문을 붙이다 옥고를 치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야심 차게 한국행을 택했지만 태극마크를 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2021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크게 유행하던 때라 출입국 절차도 까다로워 한일 양국을 오가는 것도 힘들었다. 아직 10대인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허미미의 아버지는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을 만류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은 허미미는 2022년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허미미의 성장세는 거침없었다. 약점으로 평가받던 근력을 보강해 갔고 경기 운영 능력도 국제 경험을 쌓아가며 보완해 나갔다. 허미미는 올해 5월엔 세계선수권 금메달로 세계랭킹이 3위까지 뛰어오르며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섰다.
자연스레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허미미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됐다. 생애 첫 올림픽에서 허미미는 결승까지 오르며 금메달을 목전에 뒀으나 세계 최강의 선수를 넘어서지 못했다.
허미미는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유도 여자 57㎏급 결승에서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렀지만, 지도 3개를 받으며 반칙패했다. 그래도 허미미의 은메달은 한국 유도의 2024 파리 첫 메달이다. 앞서 이틀간 치러진 남녀 4개 체급에서는 메달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 여자 유도의 은메달은 2016 리우의 정보경(48㎏급) 이후 8년 만이다.
체급 최강자이자 세계랭킹 1위 데구치를 상대로 허미미는 대등하게 싸웠다. 하지만 연장전에서 두 선수 모두 지도가 2개가 있는 상황에서 허미미가 시도한 메치기가 위장공격 판정을 받아 지도 3개가 되며 아쉽게 반칙패가 선언됐다. 그러나 이번 판정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릴 정도로 큰 논란을 불렀다. 심지어 승자인 데구치도 “유도를 위해 바뀌어야 할 부분”이라며 판정의 모호성을 지적했다. 그는 “지도 판정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지만, 유도의 다음 단계를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허미미는 이번 올림픽을 한 달여 앞두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프랑스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러 갑니다”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비록 금메달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운 은메달리스트로서 시상대에서 태극기를 보게 돼 약속은 지킨 셈이다.
결승전을 마치고 만난 허미미는 씩씩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오늘까지 유도를 열심히 했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면서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결승전에까지 나가서 정말 행복했다. 메달을 딴 것도 너무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금메달을 따면 불러야 할 애국가 가사를 미리 외웠던 허미미는 “애국가를 부르지 못해 아쉽다. 다음 올림픽에선 꼭 부르고 싶다”면서 “4년 뒤엔 체력이 더 좋을 것 같다. 다음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꼭 딸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