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정보요원 신상 털리고서야 주목 받는 간첩법 개정 논의… 22대 국회선 가능할까

현행 형법상 간첩 처벌 조항은
처벌 대상 ‘북한 간첩’에 한정
北 제외 어느 국가 위해 간첩행위
저질러도 간첩법으로 처벌 불가
21대선 민주당이 개정안 3건 발의
해놓고 민주당이 신중론 펴 ‘제동’

우리 군 정보요원들의 신상 등 기밀정보가 대량 유출된 초유의 사태를 계기로 여야 정쟁 속 뒷전에 밀렸던 형법상 간첩 처벌 조항(간첩죄) 개정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간첩법이 이슈화됐지만, 이를 계기로 늦게나마 우리나라도 해외 주요국과 같이 ‘외국’을 위해 국가 기밀정보를 누설하는 행위를 간첩법으로 처벌하는 법적 토대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간첩 처벌 못 하는 간첩법

 

31일 정치권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이른바 간첩법은 형법 98조 1항을 말한다. 이 조항은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적국’이란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적국’은 현재 정전 상태로 대치 중인 북한뿐이다. 대법원도 1983년 판결(82도3036) 등에서 ‘북한 괴뢰집단은 우리 헌법상 반국가적인 불법단체로서 국가로 볼 수 없지만, 간첩죄 적용에 있어서는 국가에 준하여 취급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북한이 대한민국의 적국임을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기밀정보를 탈취하기 위한 간첩 행위가 ‘적국’만을 위해 이뤄지는 게 아니란 점이다. 달리 말해 ‘적국’인 북한 외 어느 나라에 국가 기밀정보를 누설해도 형법상 간첩죄로 처벌할 근거 규정이 없는 것이 지금 이 나라 현실이다. 은밀히 행해지는 간첩 행위의 특성상 얼마나 많은 기밀이 처벌 걱정 없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법망 미비를 보완하기 위해 간첩법 조문 상 ‘적국’이란 단어를 ‘외국’ 또는 ‘외국 및 외국인단체’로 고치자는 것이 간첩법 개정 주장의 핵심이다. ‘외국’은 물론 ‘외국인단체’까지 포함하자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국가가 아닌 해외 무장단체 또는 연구기관(싱크탱크) 등을 통해 이뤄지는 간첩 행위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다.

김영주 전 국회부의장. 뉴시스

◆21대서 민주당이 3건 발의

 

간첩법 개정안은 역대 국회에서 꾸준히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 속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수순을 거듭했다.

 

21대 국회 들어선 김영주 전 국회부의장이 2022년 8월15일 광복절에 기해 간첩법을 발의해 법 개정 노력의 불씨를 살리고자 했다. 이후 민주당 홍익표 전 원내대표와 이상헌 전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잇따라 같은 취지 법안을 냈다. 국민의힘에선 조수진 전 의원이 발의했다. 당시엔 김 전 부의장이 국민의힘으로 옮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발의된 4건 중 3건이 민주당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들 법안도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 내 법안심사1소위 문턱을 넘지 못한 채 21대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與 “간첩법 도입돼야”

 

21대 국회 법안 1소위 회의록에 기재된 당시의 간첩법 논의 과정을 보면 여당과 법무부는 간첩법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반면 법원행정처가 반대 입장이었다.

 

행정처는 특별법 형태의 군사기밀보호법이 개정 논의되던 간첩법보다 법정형이 가벼운 점을 들어 “법체계상 검토가 필요하다”는 부정적 입장을 냈다. 또 “우방국, 동맹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와 적국, 준적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도 일률적으로 높은 법정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라고 했다.

 

행정처 논리는 우리 기밀을 탈취한 국가가 우방국이냐 비우방국이냐에 따라 간첩 행위를 한 자의 처벌 수준도 달리 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이를 두고 안보 분야 한 전문가는 “어느 국가를 위해 정보를 누설하든 간첩 행위란 본질은 그대로인데 해당 국가와의 관계가 왜 고려 대상이 돼야 하나”라고 했다.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 뉴시스

이와 관련,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은 “법원행정처 입장을 보면 굉장히 과거 시대의 입장”이라며 “이런 식으로 하면 행정처의 반대 때문에 한발 진전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새로운 경제 환경, 세계 환경이 바뀌었는데 우리가 거기에 따른 입법을 하자는 것”이라며 “과거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그걸(기존 법률체계) 가지고 말하면 곤란하지 않겠나”라고 행정처를 질타했다.

 

같은 당 정점식 의원은 “적국이 아닌 외국 또는 외국인단체를 위한 간첩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며 “외국에 유사 입법례들도 많이 산재해 있어 반드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 의원은 간첩법이 개정될 경우 기존 군사기밀보호법상 처벌 조항과 불균형이 생긴다는 행정처 의견을 두고는 군사기밀보호법을 개정하면 된다며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했다. 이노공 당시 법무부 차관도 “형법(간첩법 조항)을 먼저 개정한 후 이에 맞춰서 특별법(군사기밀보호법)을 개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며 적극성을 보였다.

 

◆野 “국가기밀이 뭐냐”

 

반면 민주당은 신중론을 폈다.

 

당시 법사위에 보임한 지 얼마 안 된 박용진 전 의원은 “이 논의를 처음 본다”며 “인력 유출은 어떻게 처벌하냐”고 했다. 이 전 차관이 “인력 유출은 지금 말한 국가기밀의 탐지, 수집 등 간첩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자 박 전 의원은 “다 간첩으로 몰아 가지고 세게 이렇게 규율하는 것만으로 이를 바라보는 게 너무 단순한 사고의 접근방식 아닌가”라고 했다. 이후로도 “그것은 어디 있어요, 국가기밀 리스트는? 제가 이것 지금 처음 봐요”라고 하는 등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세계일보 자료사진

같은 당 권칠승 의원도 “(국가기밀 개념이) 그렇게 명확한가”라고 했고, 박주민 의원과 이탄희 전 의원도 군사기밀보호법 등 다른 법과의 관계를 고려해 추가 논의를 해야 한단 입장을 이어갔다.

 

이렇듯 여야 간 평행선을 달린 간첩법 논의는 지난해 3, 6, 9월 소위에서 다뤄진 뒤 22대 총선 국면으로 접어들며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해외는 엄벌

 

해외에선 간첩 행위를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엄중 처벌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법률상 ‘간첩 및 검열의 장’, 독일은 형법상 외환죄를 두고 중형에 처하고 있다. 일본도 ‘특정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을 두고 있으며, 중국 역시 형법상 간첩죄 등 마련으로 국가기밀 외국 유출을 방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의 경우 간첩죄 처벌 대상을 ‘북한 간첩’으로 한정하고 있다 보니 적용 대상이 제한된다.

 

1993년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가 한국군과 주한미군 시설, 군의 훈련상황 등을 촬영해 슬라이드 170여장을 만들어 주한 일본대사관에 넘기는 일이 있었는데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했다. 2010년엔 현역 해군 소령이 중국 유학 중 주변국 동향 자료가 담긴 저장장치를 유출했는데 이 역시 행위 대상이 ‘적’이 아니란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 못 했다.

 

2022년 들어선 국내에서 중국요릿집을 가장한 중국의 ‘비밀경찰서’가 운영 중인 실태가 알려졌다. 우리 측 사정기관은 해당 조직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간첩법 처벌 대상이 ‘적국’ 즉 북한으로 한정돼 있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