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에서 뜨거운 혈투를 펼치는 복싱은 과거 올림픽서 한국의 메달 기대 종목 중 하나였다. 1948 런던 올림픽서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이 동메달을 따내면서 첫 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선 신준섭이 처음으로 금메달을 선사했다. 안방에서 열린 1988년 서울 대회 때 한국 복싱은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김광선(플라이급)과 박시헌(라이트미들급)이 나란히 금메달을 휩쓸며 국민을 영광 시켰다. 마지막 금빛 펀치였다. 이후에도 한국 복싱은 2004 아테네 동메달 2개, 2008 베이징 동메달 1개, 2012 런던 은메달 1개를 따내며 꾸준히 메달을 수확했다.
하지만 한국 복싱은 급격한 침체기를 맞이했다. 2016 리우 대회와 2020 도쿄 대회 때 노메달에 그쳤다. 도쿄 올림픽서 남자 선수들은 본선 무대를 밟지도 못했고, 여자 복싱에서만 페더급 임애지(25·화순군청)와 라이트급 오연지(33·울산광역시체육회)가 출사표를 던졌다. 결과는 두 선수 모두 1회전 탈락.
이번 2024 파리 올림픽도 남자 복서들의 부진 속에 임애지와 오연지가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 나선 ‘간판’ 오연지는 32강전서 우스이(대만)에게 무릎을 꿇으며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 임애지가 한국 복싱에 8년 만의 승전고를 울리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제 1승만 추가하면 한국 복싱 12년 만의 올림픽 메달이자 여자 복싱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남긴다.
임애지는 3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노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복싱 여자 54㎏급 16강전에서 타티아나 레지나 지 헤수스 샤가스(브라질)을 상대로 4-1로 판정승을 거뒀다. 대진 추첨 결과 32강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16강전을 승리로 장식해 단숨에 8강에 올랐다. 한국 복싱 선수가 올림픽에서 승리를 거둔 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함상명 이후 임애지가 처음이다.
아웃복싱 스타일의 임애지는 경기 내내 경쾌한 발놀림으로 상대와 간격을 유지하며 포인트를 착실하게 쌓았다. 줄곧 우위를 점하면서 링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임애지는 판전승을 거두자 기쁨을 만끽했다.
임애지는 경기 뒤 “준비한 것은 70% 정도만 한 것 같다”며 “아쉽지만, 이제부터 연습해서 보완하겠다”고 욕심을 내비쳤다.
임애지의 다음 상대는 콜롬비아의 예니 마르셀라 아리아스 카스타네다이다. 경기는 한국시간으로 다음 달 2일 펼쳐진다. 복싱은 준결승에만 진출해도 동메달을 확보한다. 임애지가 다음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다면, 2012 런던 대회 한순철(남자 라이트급 은메달) 이후 한국 복싱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달을 목에 건다. 여자 복서로는 최초의 메달이다.
임애지는 “올림픽은 올림픽이다. 누구를 만나도 쉽지 않다”며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오)연지 언니가 후회 없이 즐기고 끝까지 하자고 응원해줬다. 저도 힘내서 언니 말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하고자 했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끝으로 임애지는 “8강에 올라갔는데 (방송에서) 중계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복싱 많이 응원해주시면 열심히 해서 도움이 되겠다”고 당차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