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이 그제 권순일 전 대법관을 피의자로 불러 조사했다. 법치국가의 상징인 최고법원 구성원을 지낸 인사가 피의자 신분이 된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검찰은 이번 소환조사 결과를 토대로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고 권 전 대법관이 연루된 모든 의혹의 진상을 국민 앞에 낱낱이 공개해야 할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권 전 대법관은 퇴임 직후인 2020년 11월 변호사 등록도 하지 않은 채 화천대유 고문으로 취업해 소송 관련 업무를 돕고 1억5000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화천대유는 대법원 출입기자로 오래 일하며 권 전 대법관과 친하게 지낸 김만배씨가 대주주로 있던 회사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현직 대법관이던 2020년 7월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의 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김씨 부탁을 받고 무죄 취지 판결의 선고를 주도했다는 ‘재판 거래’ 의혹이다.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원의 항소심 재판 결과가 대법원에서 뒤집힌 것이다. 당시 대법원장 바로 아래 ‘2인자’이던 권 전 대법관의 무죄 의견이 후배 대법관들 사이에 상당한 무게감을 지녔으리란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검찰 조사 결과 김씨는 이 전 지사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를 전후해 대법원 청사 내 권 전 대법관 집무실을 8차례나 방문했다. 대법관실은 출입기자라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다. 권 전 대법관과 김씨 둘 다 “재판에 관해선 얘기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더욱이 권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대장동 사건의 주역인 김씨에게 거액을 받거나 받기로 했다는 이른바 ‘대장동 50억 클럽’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사실이라면 우리 사법부의 신뢰를 완전히 허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검찰은 엄정한 수사를 통해 권 전 대법관의 법적 책임을 명명백백히 가리길 바란다.
권 전 대법관이 50억 클럽 의혹 등과 관련해 고발을 당한 것은 2021년 9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3년 가까운 기간 검찰이 한 일이라곤 두 차례 비공개 소환조사와 변호사 사무실 압수수색이 고작이다. 이 전 지사가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이후에는 당 대표가 되자 그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옛말에 “오이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고 했다. 검찰이 그런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수사에 속도를 내 국민이 공감할 만한 결론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