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의 천재 작가 송기원 작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어.”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즈음, 그가 불쑥 던지는 게 아닌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다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한 뒤 말을 이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 웃으며 이유를 묻자, 그의 무심하게 대답했다.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염세가 아니라 혐세라고 할까.”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6월 인터뷰가 끝난 뒤 그와 함께 해남 읍내로 가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저는 고양이들에게 손으로 획 던져 음식을 주는데,” 우연히 고양이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동석한 상주 작가 이원화씨가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송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음식을 놓은 뒤, 먼저 한 점을 먹어 고양이들을 안심시키더라고요. 얼마나 고양이에게 끔찍하게 하시는지….”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그는 짐짓 못 듣는 채했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우리는 헤어졌다. 이때 소설가 송기원은 고양이에게 가져다 준다며 생선 한 조각을 비닐봉지에 담고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뒷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네 차례나 투옥될 정도로 민주화운동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등을 비롯해 예리한 현실인식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준 송기원 작가가 31일 오후 숙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유가족들이 1일 밝혔다. 향년 77세.

 

일찍이 명상과 깨우침에 뜻을 두고 지리산은 물론 인도, 네팔 등을 다니며 수련했던 그는 자신의 명상 여정을 담아 마지막 장편소설 『숨』(2021)을 발표하기도 했고, 2022년에는 전남 해남군 땅끝순례문학관에서 강대철 조각가와 함께 잠언시와 수묵화를 전시하기도 했다.

 

엉덩이를 하늘로 한 채 두 손과 두 발을 교실 바닥에 모아서 엎드려뻗쳤다. 교단 근처에서 시작된 매는 서열에 따라서 빠르게 내려왔다. 동아리에 들어온 뒤 데싱만 열심히 배웠던 그에게도 올 것이 왔다. 이른바 ‘줄빠따’였다. 그날 광주 조대부고 미술부 교실에선 매 소리가 마치 풍경화처럼 메아리치고 있었다.

 

며칠 전 광주사직공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이 참여해 문화예술의 재기를 겨루고 즐기는 호남예술제가 열렸다. 조대부고 미술부 소속이던 그 역시 친구들과 함께 예술제에 참여했다. 그는 “심심해서 끄적끄적해 써냈”다. 다만 그가 끄적인 뒤 제출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시였다. 그런데 덜컥 호남예술제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그는 그림이 아닌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고 미술부에서 ‘줄빠따’를 맞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송기원은 중학교 2학년 때 유서를 쓴 뒤 공동묘지 옆의 늙은 소나무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표현대로 “얼굴조차 모르는 노름쟁이에다 아편쟁이인 건달의 사생아라거나, 오일장을 떠돌며 미역이나 멸치를 파는 가난한 장돌뱅이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른다”(장편소설 『숨』, 13쪽).

 

미술부에서 퇴출된 조대부고생 송기원은 교내 문예부에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문예부에 들어갔다. 그가 불현 듯 문학의 세계로 걸어 들어선 순간이었다. 작가 송기원의 원점이었다. 이후 서라벌예대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으로 뽑히면서 4년 장학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입학 뒤에는 서정주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재학 중에는 주로 시를 썼고, 아주 가끔씩 소설을 썼다.

 

1947년 보성의 조성장터에서 태어나고 자란 송기원은 1974년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신춘문예 동시 등단이라는 비범한 출발임에도 그는 심상하게 말했다. “돈 놓고 돈 먹기지, 뭐. 아무거나 되라, 하고 냈는데, 둘 다 돼버렸어.”

등단 이후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 『숨』(2021) 등을, 소설집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 『사람의 향기』(2003), 『별밭 공원』(2013) 등을 발표했다.

 

예리한 현실인식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해 “처음 리얼리즘 쪽이었지만, 징역을 다녀오고 나이가 들면서 내면을 추구하는 쪽으로 갔다. 내면 안에서 리얼리즘을 발견하려고 했다”고 스스로 평했다. 그 사이 동인문학상과 오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시도 꾸준히 써서 시집으로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2006), 『저녁』(2010) 등을 펴냈다. 그의 시집 『저녁』에는 죽음을 다룬 시가 적지 않았다. 늦은 밤, 장례식장에 홀로 남아 영정 속 웃음과 마주하며 위로받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자정이 지나면서 문상객들이 빠져나가고,/ 영안실에는 오롯이 너와 나만 남았다.// 깨지기 쉬운 엷은 유리막이라도 만지듯, 너의 눈길은/ 영정 안에 들어 있는 나의 웃음을 어루만진다.// 아아, 마지막으로 따뜻하구나.// 문상객들의 거친 눈길을 대하며, 해종일/ 언제 깨질 줄 몰라 조마조마하던 나의 웃음을// 이불이듯 덮어주는 너의 눈길은.”(「영정」 전문)

 

송기원은 1970, 80년대 네 차례나 투옥되며 민주화의 한 복판에 섰다, “어쩌다보니”.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서라벌예대에서 소설을 가르쳤던 소설가 이호철의 구속에 문인들과 함께 데모에 나섰다가 처음 구속된 이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1990년 『붉은 산 검은 피』를 펴낸 오봉옥 시인의 필화사건 등으로 모두 네 차례나 구속됐다.

 

특히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과정은 헛헛하기 그지없다.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뒤늦게 복학해 교생 실습 중이던 1980년 5월, 그는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되는 백남기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전두환 화형식에 참여했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처음에는 전두환 화형식을 학교 안에서 한다고 하더라. 흰 가운을 입은 의대 1학년생들을 중심으로 상여를 매고 학교 안에 뱅뱅 돌더니 갑자기 시내로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예이, 모르겠다, 하고 나가자고 했어요. 상여를 앞세우고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국회의사당을 빙 돌아 서대문에 오니까 경찰이 허공을 향해 총을 빵빵 쏘더라. 다시 상여를 이끌고 서울시청으로 간 뒤 서울역으로 가서 화형식을 끝마쳤어요. 그런데 화형식 시위는 외신을 타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더라. 5월17일 계엄령이 발동됐지요.”

 

1개월 뒤 붙잡힌 그는 남산 안기부에서 가혹한 조사를 받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두 번째 구속이 되고 만다.

 

“안기부에서 직살나게 얻어터졌는데, 처음에는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상여를 사서 화형식을 한 것으로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김대중을 알지도 못하고, 백남기가 주도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대중이 고은 시인에게 돈을 줬고, 다시 고은에게 돈이 온 것으로 하자고 했어요. 고은은 짠돌이여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둘째 딸이 5000원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고은에게서 1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둔갑시키더라. 그 돈으로 상여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었어요(웃음).”

 

더구나 그가 두 번째 징역을 살고 있을 때, 화성에 살고 있던 어머니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동안 실천문학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나 윤재걸의 『화려한 휴가』, 김신의 『졸병시대』 등 잇따라 베스트셀러를 펴내며 실천문학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네 번째 징역에서 풀려난 뒤 실천문학을 그만뒀다. 이 시기 모습에 대해, 그는 책에서 “위선의 탈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성역에 빌붙어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고 말았다. 그 방법이 바로 위선이었다. 나는 괴물의 얼굴에 위선이라는 탈을 뒤집어썼다. 그리하여 운동권의 여러분들은 물론 세상을 향해, 추악한 괴물 대신에 위선으로 위장한 얼굴을 버젓이 내밀었다.”(『숨』, 14쪽)

 

그는 이후 소설도 쓰면서 중앙대 문창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섰다. 하지만 둘째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1년간 병간호에 전념했고, 딸을 세상을 떠나자 그는 명상, 요가 등에 빠져들어 처사처럼 곳곳을 부유했다.

 

고인의 가족으로는 딸 송가은(48)씨가 있다. 빈소는 대전 유성선병원 장례식장 VIP3호실, 발인은 8월3일(토) 오전 8시, 장지는 세종은하수공원. 문의 전화는 042-825-9494(선병원 장례식장).

 

만약 작가 송기원이 내세에 고양이로 태어난다면, 고양이의 삶이 진짜이고 인간의 삶이란 한갓 꿈일까, 아니면 고양이로 태어난 것이 한갓 꿈일까. 상경하는 기차 속에서 절급하게 궁금해 그의 시를 찾아 읽은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참 오래 머물렀다./ 주인이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귓구멍에 감창이 들어차고/ 뱃구레 가득히 욕지기가 출렁거려/ 똥구멍이 미어지는 수모를 견디고야, 비로소/ 몸이 나를 버렸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