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골목이라는 시간 열차

어린시절 추억 깃든 고향 골목
단층집 대신 곳곳 키다리 건물
타임머신 탄 듯 과거·현재 혼재
미래에는 어떤 성형 하게 될까

골목은 변형된다. 굽은 것은 펴지고, 낮은 것은 높아지고, 밋밋하던 것은 화려해진다. 그러나 효율성에 따라 변화 속도의 완급이 다르다. 어릴 때 내가 2여 년 살던 부산 사하구 신평동의 골목이 그렇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단층이던 집들이 대부분 3, 4층 높이로 변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골목 안에 있던 시장은 ‘신평골목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마주 오는 사람을 비켜서기도 불편한, 아주 좁은 골목 양편으로 예전처럼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흥정할 여유를 주지 않아도, 적절한 타협으로 균형을 이루며 여태 골목시장의 면모를 이어온 것이다.

신평동은 과거 충무동 철거민들을 이주시킨 곳인데, 10여 개의 골목이 곧게 뻗어 있고 그 사이로 집들이 아주 긴 열차처럼 이어져 있다. 전선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집과 집 사이에는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이다. 건물의 삼면(三面)이 다른 집과 밀착되어 있어서 창문은 골목 쪽으로만 낼 수 있다. 골목의 폭은 예전 그대로인데, 건물만 증축하여 비좁은 하늘이 겨우 숨통을 트이게 하고 있다. 이 오래된 골목은 시간열차를 타고 먼 과거로 갔다가 이제 막 도착한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혼재한 상태로 서 있다.

천수호 시인

과거의 풍경과 현재의 사람이 뒤섞이는 생경함 때문일까. 오래된 골목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도 있다. 모로코 페스의 구도시 메디나가 그렇다. 여기에는 9000개가 넘는 골목이 미로를 이루고 있는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시를 미로로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이곳의 이방인들은 안내자가 없으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의 알록달록한 물건들에 현혹되기라도 하면 이내 혼미해지고, 짐 실은 당나귀라도 지나갈 때는 아무리 바쁜 사람도 느긋하게 길을 비켜야 한다. 그러나 가이드의 눈을 피해 한 번쯤 헤매고 싶은 충동이 일기까지 하는 묘한 곳이다.



모로코 탕헤르의 골목길이 영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최고의 암살요원 제이슨 본 시리즈 중 세 번째 영화인 ‘본 얼티메이텀’도 이곳이 중요 장면의 배경이 되었다. 제이슨 본과 암살자의 추격전은 집과 집의 간격이 촘촘한 탕헤르 골목의 미로가 적격이었다. 건물의 지붕을 뛰어넘고 창문에서 창문으로 건너뛰는 긴박하고 아슬한 장면은 그곳이 좁은 골목이었기에 더 실감 나는 영상이었다. 금방이라도 옆집으로 훌쩍 건너뛸 수 있을 것처럼 호기심을 부추기는 골목 구조가 한몫을 한 것이다.

이런 골목이 아름다운 건 무엇보다 골목이 갖고 있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좁은 골목을 공유한 사람들의 영혼이 깃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오래된 골목의 매력이다. 그날 이 골목에선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대문은 잘 닫혀 있었을까. 골목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자고 기억을 마구 흔든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그런 생각 속에 있을 때,// “우리 이야기 좀 하자”//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황인찬 시인의 시 ‘부서져버린’ 부분 인용)

후덥지근한 좁은 골목에서 옛집을 찾아 기웃거린다. 골목 끝에서 걸어보면 여기 어디쯤일 텐데, 그때와 지금은 보폭이 너무 다르다. 시간열차는 벌써 세 명의 가족을 싣고 떠났다. 여덟 식구가 수제비를 먹던 그 마루는, 차창 밖에서 바라보는 열차의 가족석처럼 허공 위를 쓱 지나간다. 비둘기가 자주 앉았다 가던 연한 연두색 대문도 사라졌다. 가끔 꿈속에서 부르던 친구의 목소리도 없다. 숲속 나무처럼 일조량의 키를 높이느라 집의 얼굴이 많이 바뀌어 왔듯, 골목이라는 시간열차는 더 늙은 내가 있는 쪽으로 또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그러는 동안 골목은 또 어떤 성형을 하게 될까.

 

천수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