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돼지’라 불린 소녀들… ‘조선인 여공의 노래’ 개봉

“조선인 여공이 사람이라면, 나비나 잠자리는 새라고 해야겠지.”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방적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여공들은 이런 멸시를 받았다. 일본인들은 10·20대 조선 여공들을 ‘돼지 여공’ ‘조선인 돼지’라 불렀다. 이 소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사진)은 이들이 겪은 고난과 희생, 이를 딛고 일어선 강인함을 담았다.

 

영화는 1910∼50년대 일본 오사카 지역 방적공장에서 일한 신남숙, 김순자, 김상남씨 등의 증언과 기존 연구들을 토대로 제작됐다. 재일조선인 작가 김찬정이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책 ‘조선인 여공의 노래’도 참고했다. 

 

조선인 여공은 주로 10대였다. 신남숙(99)씨는 12살에 공장에 취업했다. 김상남(98)씨는 11살인데 13살로 속이고 일했다. 당시 단체 사진을 보면 한복차림의 여공들은 초등학생처럼 말갛고 앳되기 그지 없다. 영화를 만든 이원식 감독은 “조선인 여공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지만 모집인에 속아서 갔다”며 “일본의 침략에 의해 조선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상대적으로 일본은 방적 공장과 군수산업으로 호황을 누렸다”고 설명했다. 

 

방적 공장은 2교대였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일하면 졸음이 몰려와 꾸벅꾸벅 졸았다. 깜빡 졸다 눈을 뜨니 팔이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살점이 다 떨어진 소녀도 있었다. 아파서 기절했지만 감독관은 “이 새끼, 조니까 다치는 거야”라고 말했다. 

 

번 돈은 최소한만 남기고 가족에게 송금했다. 늘 식사량이 모자랐다. 여공들은 배고프면 일본인들이 ‘호루몬(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라는 뜻)’이라며 버리던 육류의 내장을 얻어와 구워 먹었다. 호루몬은 이제는 일본의 인기 음식이 됐다. 한 여공은 생선가게에서 생선을 사려 하자 “조선 돼지에게 이런 건 사치야”라며 거절 당했다. 가게 주인이 사라며 가리킨 생선은 3∼4일된 썩은 물건이었다. 

 

방적공장은 ‘빨간벽돌 감옥’이라 비유됐다. 공장 벽 위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철조망이 있었고, 확실한 이유를 대고 허가서에 몇 개의 도장을 찍어야 겨우 나갈 수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 말해도 내보내주지 않았다. 

 

감독관은 이들을 두드려 팼다. 조선인 감독관도 상부에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똑같이 때렸다. 조선인 남성들로 구성된 상애회라는 친일단체도 이들을 착취했다. 오사카 상애회는 악질 중의 악질로 전해진다. 이들은 여공의 급여에서 수수료를 가로챘다. 여공들을 무작정 불러내서는 돈을 낸 조선 남성과 바로 결혼시켰다. 성적 착취도 있었다. 일부 여공들은 열악한 환경과 폭력 속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았다. 김상남씨는 “일본 사람들이요 나한테 쪼메 띡띡거려 보이소. 내가 가만있는가. 절대로 안 졌지”라며 “조선 어쩌고 하면 바로 가서 무슨 소리야 하고 따지니까 일본 사람들이 무서워했어”라고 말한다. 

 

이들은 배우고 저항했다. 글을 몰라 어머니에게 직접 편지조차 쓰지 못했기에, 야학을 열어 한글을 공부했다. 근로환경 개선과 부당해고 철회를 위해 쟁의에도 나섰다. 일본 경찰과 폭력단의 과잉진압으로 쟁의는 실패했지만 “그녀들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승자처럼 당당했다”라고 영화는 전한다.

 

이 감독은 “강제징용은 많이 알려졌으나, 조선 여공들은 민간 차원의 민중 역사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영화를 찍게 됐다”며 “모진 시간을 극복한 조선인 여공들은 재일코리안의 뿌리와 모태가 되었고 대를 이어 가족을 지키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공들의 삶을 긍정과 승리의 관점에서 그리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이 이야기는 100년 전 그들이 아닌 우리 민족의 현재 이야기이자, 동시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며 “이들이 힘든 순간에도 밝고 건강하게 삶과 가족을 지키려 한 긍정적 메시지들이 요즘 관객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했으면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