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의 길』 에번 토머스 “핵폭탄이 던진 도덕적 딜레마와 내면의 전쟁 벌인 영웅들 있었다” [김용출의 한권의책]

많은 전함들이 바다 곳곳에서 침몰했고, 도시들은 폭격으로 불탔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일제의 패배는 객관적으로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500만 명의 일본군과, 군부 지도자들은 스스로 항복할 의사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항복이라거나 패배라는 표현 자체를 금기시했고, 마치 집단 자살을 각오한 듯 야수 같은 항전의 의지만 내비쳤다.

원폭 직후 나가사키

연합군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집결시켜 일본 본토 상륙을 준비했지만, 예상된 사상자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조차 부하들에게 숫자를 조작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합동참모본부는 연합군이 독일군을 무찌르려면 반년, 일본군을 쓰러뜨리려면 1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심지어 미군은 공군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작은 이오지마 섬조차, 5주 동안 해병대원 7000여명이 사명한 끝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일본군 역시 2만 명이 희생됐지만. 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된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어마어마한 인명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미군에게 압도적인 무력인 핵폭탄을 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진 결론이었다. 1945년 3월, 미군 육군부와 공군부를 합친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엄격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음에도, 일본과의 전쟁에서 훨씬 더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져 갔다. “인간의 평범한 삶에 미치는 효과에서 국제적인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고 완전하게 할 수도 있다. 프랑켄슈타인이거나 세계 평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77쪽)

 

그는 핵폭탄이 악마 같은 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더 많은 희생을 피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핵폭탄을 투하할지, 투하한다면 언제 어디에 투하해야 할지를 트루먼 대통령과 결정해야 했다. 윤리적 가치와, 국익을 위한 냉혹한 힘의 사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 칼 스파츠

태평양 전략폭력 사령부 수장이었던 칼 스파츠는 스팀슨 장관이 서명한 핵폭탄 투하 명령서를 받은 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임무를 조용하고 충실하게 준비했다. 작전명은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

 

사실 그는 처음 핵폭탄 투하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다. “주민 전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도시의 파괴 자체에 결코 찬성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핵폭탄에 관해 논의했을 때에도 그것에 찬성하지 않았다.”(20쪽)

 

하지만 일제와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오히려 ‘1억 총옥쇄’ ‘본토 결전’ 운운하며 항전을 거듭 천명하자 핵폭탄 투하 계획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중에 눈을 감을 때까지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즉각 모든 일본군의 모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그 행위를 성실하게 지키겠다고 적절하고 충분하게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본에 돌아갈 것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이다.”(151쪽)

 

7월26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일본 군부는 ‘최후통첩’격인 포츠담선언을 격렬히 비난한 뒤, 언론을 통해서 “묵살”하고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이었다.

 

“(8월6일) 새벽 3시 직전 에놀라 게이가 (마리아나제도 티니언 섬의 제20비행단 기지) 활주로를 출발한다. 티비츠는 더는 늦출 수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조종간을 잡아 당겨 극도로 무거운 폭격기를 어두운 밤바다 위로 띄워 올리고, 관제탑은 경악한다. 그날 밤은 아름답다. 아래쪽에는 구름 띠가 초승달 빛에 아련히 어른거린다. 티비츠 대령은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듯이’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담뱃대, 궐련, 담배. 환하게 동이 튼다. 밝은 햇빛 속에서 에놀라 게이는 일본 해안으로 다가간다. 앞에 도시 하나가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티비츠는 승원들에게 묻는다. ‘이게 히로시마겠지, 다들 동의한 거지?’ 폭격수는 목표 지점을 탐색하고,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T자 형태의 교량으로 목표 지점이 정해진다. 8시15분 15초, 폭탄 투하실의 문이 열리고,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티비츠는 비행기를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돌린다. 43초 후 조종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충격파가 비행기를 때리고, 티비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소리친다. ‘대공포!’ 뒤를 돌아보니 에놀라 게이를 향해, 훗날 그의 회상에 따르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끔찍하게’ 솟구쳐 오르는 구름이 보인다. 아래쪽에서는 히로시마가 타르 양동이처럼 검게 끓어오른다.”(175~176쪽)

 

결국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투하됐다. 인류 최초의 원폭 투하였다. 7만 명이 즉사했고, 또 다른 약 7만 명은 좀더 천천히 이 세상을 떠났다. 다시 사흘 뒤인 8월9일 규슈의 나가사키에도 핵폭탄 ‘팻 맨(Fat Man)’이 투하됐다. 하루 전에는 휴전 협상을 기대했던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만주로 침공을 개시했다.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전쟁 막바지 최고전쟁지도자회의 참석자 6인 가운데 일본의 항복을 바라고 추진하려 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후의 항전이나 결전이 아니라 오히려 항복만이 일본과 덴노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임진왜란 전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예공의 후손인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전쟁 개시 1년도 되지 않아서 도조 히데키 장군과 사이가 틀어져 산악지대 나가노에서 패망한 나라들을 공부한 그였다.

 

그는 전쟁 막바지 다시 외무대신으로 돌아온 뒤, 핵폭탄 투하 후에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군인들에 맞서 히로히토 덴노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8월15일 정오 일본 전역에서 ‘라디오 도쿄’를 통해 히로히토 덴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않고, 게다가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참해를 벌이는 등 진실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마침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 문명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덴노는 ‘항복’이라거나 ‘패전’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기이한 문장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자 패전 선언이었다. “생각하건대, 이제부터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진실로 심상치가 않다. 너희 신하와 백성의 충정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곤란을 감당해내고, 참아야 할 곤란을 참음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시대를 열고자 한다.”

 

덴노의 항복 선언 직후 일본 제국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리고 9월9일 미국 미주리함 함상에서 도고의 후임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쓰 마모루와 육군참모총장 오메즈 요시지로가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미국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

작가이자 기자인 저자는 책 『항복의 길』(조행복 옮김, 까치)에서 1945년 수백만 명의 운명을 쥐고 있던 미국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과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 칼 스파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세 사람의 동선과 심리적 고뇌를 중심으로 2차 대전 막바지 원자폭탄 투하 및 일제 항복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했다.

 

책에는 핵폭탄 투하 작전이 가시화한 1945년 3월부터 8월 원폭 투하, 일본 덴노의 항복 선언, 9월 항복 조인식 등 지옥과 같았던 2차 대전의 마지막 시기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강력한 무기로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고뇌하던 미국인들과, 패배가 확실시되었음에도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묵살하면서 어떻게든 덴노제를 보존하려 했던 일본 군부의 어리석음과 야수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과연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옳았을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이 같은 질문은 핵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없었다거나 핵폭탄을 2기까지 투하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일본 우익들은 이 같은 질문을 확대하고 비약해 자신들을 전쟁의 또다른 피해자, 희생자라는 프레임을 재가공하기도 한다.

일본 항복 조인식

하지만 책에 따르면, 진실은 달랐다. 핵폭탄이 2기나 투하되고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만주전선에 참전했던 8월9일 아침에도, 일본 제국을 이끄는 최고전쟁지도회의는 항복 여부를 두고 끝내 입장을 모으지 못했다. 오히려 육군을 지휘한 가장 강경한 지도자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자살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우길 원했다. 미국은 세 번 째 원폭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했다.

 

심지어 일본 군부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기도 했다. 가열찬 항전을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모의한 소장파 장교들은 8월14일 황궁을 장악하고 다음날 정오에 방송될 예정이던 덴노의 육성 항복 테이프를 찾기 위해 분주했다.

 

1945년 뜨거운 여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세 사람 스팀슨과 스파츠, 도고. 저자는 이들에 대해 인간의 모순적 운명 앞에서 핵폭탄이 던진 고통스러운 내면의 전쟁을 벌인 영웅이었다고 상찬한다.

 

“일본의 항복은 큰 희생을 치른 뒤에 찾아왔다. 양측의 결정권자들은 희망적인 생각과 심리학적인 부인에 빠졌다. 승자에게도 마음의 평안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수십만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이 되었을지도 모를 목숨을 더 잃기 전에 항복했다. 스팀슨과 스파츠, 도고는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끝내 성공했다.”(310쪽)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책은 20세기 역사가 남긴 주요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Road To Surre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