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특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파트에서 장시간 정전까지 발생해 무방비로 무더위에 노출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전기가 끊겨 에어컨·정수기·인덕션을 쓸 수 없고, 엘리베이터마저 멈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전을 경험한 이들에게 물어보았다.
◇ 어린아이·노인 특히 취약…"생수 준비해두고 냉장고 문 열지 말아야"
지난 4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한 아파트에서 21시간 동안 정전을 겪은 70대 여성 A씨도 6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고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밥솥을 못 쓰니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밤에 너무 더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잠도 못 잤다"고 말했다. A씨는 9일 연합뉴스와 다시 통화하며 "전력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아직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고 있다. 평소처럼 전기를 쓰려면 한 달은 걸린다더라"고 전했다.
A씨는 "암 환자인 남편과 11층에 살고 있다. 정전 다음 날(5일) 남편과 함께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는 데 40분이 걸렸다"며 "휴대전화 배터리를 다 쓰고 나면 우리 같은 노인들은 말 그대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걱정했다.
김씨처럼 어린아이가 있거나 A씨처럼 노인·환자가 있는 집은 분유를 타거나 죽·이유식을 덥히기 위해 온수와 전자레인지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럴 땐 근처 편의점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A씨가 사는 아파트 인근 편의점 직원은 "정전 당시 편의점에 찾아오신 분은 없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다른 정전 지역 편의점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단, "이유식이면 몰라도 일반식은 어렵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점포도 있었다.
정전되면 아파트 1층 공동현관문은 열 수 있을까. 양성관 과장이 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대부분의 공동현관문은 센서가 다가오는 사람을 감지하고 문을 여는 전자식 잠금장치를 이용하는 만큼 정전 시에는 잠금장치도 멈추기 마련이다. 이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정전 시 관리사무소가 공동현관문을 열어 놓지 않더라도 손으로 밀면 쉽게 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능한 냉장고 문을 열지 말고 음식은 구분해서 보관하는 게 좋다고 권하고 있다. 보통 조리되지 않은 어육류에서 채소류나 조리된 식품으로 병균이 옮아 상하는 음식이 늘기 때문이다. 8일 고양 덕양구 한 아파트에서 10시간 정전을 겪은 50대 남성 B씨 역시 "상식대로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 과장은 "냉장고 안 음식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바로 버리라"고 조언했다. 그는 "냉장고가 멈추면 생각보다 음식이 빨리 상한다"며 "특히 어르신들이 음식을 잘 버리지 못하시는데 식중독에 걸리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행정안전부 "폭염에 정전이 겹치면? '구체적 행동 요령'은 없네요"
정부는 다양한 재난 시 국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국민재난안전포털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해보면 정전과 폭염 각각에 대한 행동 요령은 있지만, 정전으로 인해 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람들을 위한 요령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정부의 대응책은 정전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과 정전 발생 시 빠르게 복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 사례처럼 24시간 가까이 무방비로 방치되는 주민들을 위한 지침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8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정부 차원의 지침은 없지만, 지난 1일 전기차 화재가 발생한 인천 청라동 아파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주민 대피 기간이 길어지자 정부와 지자체에서 주민 구호에 나서지 않았느냐"며 "청라동 사례와 마찬가지로 정전이 장기화한다면 행안부 구호과나 지자체에서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대문구는 4일 발생한 청량리동 아파트의 정전이 길어지자 무더위 쉼터를 24시간 개방하고 주민들에게 생수를 제공했다. 대구 수성구청도 지난 1일 정전된 아파트에 생수를 지원했다. 지자체가 주는 생수가 오기 전까지 마실 물은 스스로 갖춰놓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폭염 피해에 대한 정확한 지침은 없지만, '정전 및 전력부족 시 국민 행동 요령'과 '폭염 시 국민 행동 요령'을 종합해 참고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정전에 대비해서 ▲ 손전등이나 양초를 구비해두고 ▲ 전자기기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으며 ▲ 컴퓨터 등 정밀전자기기를 사용한다면 평소 전기를 저장했다가 정전 시에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소형 무정전 전원공급장치(UPS)를 설치하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 UPS는 의료기기, 정수기, 어항 산소발생기 등에도 사용할 수 있다. 단, 제조업체에 따르면 에어컨이나 냉장고같이 소형 UPS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전력 소모가 큰 대형 가전제품에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정전이 발생했다면 ▲ 한전 선로 고장일 경우 금방 복구되니 당황하지 않고 ▲ 아파트 자체 설비 고장일 경우 관리사무소에 연락한다. ▲ 주류와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수분을 배출하는 이뇨 작용을 촉진하기 때문에 마시지 말아야 하며 ▲ 노약자와 어린이는 더위에 취약하니 건강관리에 유의하고 보호자와 지원기관 연락처를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 자녀와 떨어져 사는 노인의 경우, 자녀가 '안전디딤돌' 앱을 통해 부모님이 거주하는 지역의 안전·재난 문자를 수신할 수 있다. 지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해당 서비스를 통해 인지하고 부모님의 안부를 꾸준히 확인해야 한다.
전기가 들어오면 ▲ 가전제품 플러그를 천천히 하나씩 꽂아 과전류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고 ▲ 냉장고의 식품을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시엔 바로 버려야 한다.
◇ 대부분 낡은 변압기 탓, 자주 점검하고 필요하면 교체해야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예전처럼 발전량이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해 정전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전 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정전의 상당수는 준공 20년이 넘은 아파트에서 발생했고 원인은 아파트 자체 설비, 특히 변압기 고장"이라고 말했다. 한전 설비의 문제라면 한전 대응팀은 24시간 대기하기 때문에 즉시 조처할 수 있지만, 아파트 자체 설비의 경우 사설 업체를 써야 하므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게 한전 측의 설명이다.
정전 예방을 위해 한전에서는 15년 이상 된 변압기에 대해서 설비 진단 및 교체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산업부에선 오래된 변압기 교체를 도울 목적으로 전력 기금을 마련해 운영 중이다.
한전 관계자는 "장시간·대규모 정전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아파트 자체적으로 전기 설비 유지·보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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