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이 쓴 유묵 120년 만에 일본서 돌아온다

일본에서 판매되려던 의병이 쓴 글이 12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다.

 

양승운 의당학연구소장은 의당 박세화 선생이 72세(1905년)에 쓴 유묵(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긴 글씨)을 일본에서 입수했다고 14일 밝혔다.

 

12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오는 유묵은 196.5×55㎝의 족자에 담긴 164×45㎝ 크기로 한지에 먹으로 글을 썼다.

 

의당 박세화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옥고를 치르는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유묵. 제천시 제공

연구소에 따르면 박세화 선생이 1905년 춘추대의 정신으로 월악산 용하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아들과 손자, 문인들과 함께 한국주차군사령부(현 서울 명동 소공동 일원)로 연행돼 8개월간 투옥된 시점이다.

 

또 유묵이 발견된 장소와 일본식 족자의 형태, 72세 수결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서울에 투옥됐을 때 일본인에게 써준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묵은 보관하고 있던 일본 후손이 일본의 한 고미술상에 팔려고 내놓은 것을 알고 입수했다.

 

박세화 선생이 감옥에 갇혔을 때 칠언절구의 시고 유묵을 선물 받았다면 그와 교분이 있고 문헌이 있는 인물로 일본으로 가져가 족자로 꾸며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글엔 “평생 공자를 배우고 또 배우니, 한번 죽어 공자를 도모함에 부끄러움이 없구나. 도가 없어진 지금 살아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늘은 나를 미워하지 않을 뿐이구나 72세 박의당 서”라고 적혔다.

 

이 글에 대해 양 소장은 “성리학자 박세화 선생이 평생 공자의 학문을 배우면서 부끄러움이 없다. 자정 순국(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면서 일본 통치에 굴하지 않을 뜻을 세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저항)을 결심하고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선생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경훈 원광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도 박세화 선생의 친필임을 확인했다.

 

정 교수는 친필의 제작 시기를 놓고 ‘의당집’ ‘연보’에 “선생이 저들에게 오랫동안 구류돼 주상(고종황제)께서 딱하고 가엾음에 하교가 있었다. 선생께서 여러 번 적 우두머리를 깨우쳤는데 무고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구류함을 꾸짖으니 적들도 감동하였다는 연보 기록과 일치하는 중요한 유묵”이라고 했다.

 

이어 “박새화가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갇혔을 때 그의 행적을 연구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이미 자정 순국을 결심한 내용이 있어 가슴을 크게 울린다”고 전했다.

 

유묵은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억류됐을 때 일본인에게 글씨를 써준 것이나 19010년 중국 뤼순 옥중에서 순국을 앞두고 일본인에게 글씨를 써준 안중근 의사처럼 대한인의 품격과 기품을 보여주는 명작으로 전해진다.

 

한학자인 박세화 선생은 함경남도 고원에서 제자들을 찾기 위해 태백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제천시 월악산 용화동에서 자리를 잡고 제자들을 지도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제자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밀고로 옥고를 치른 박세화 선생은 1909년 조상의 묘가 있는 음성군 동음리 창동 마을로 이사를 했다.

 

1910년 마을 이장으로부터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조상의 묘에 자기 뜻을 고하고 23일을 굶어 순국한다.

 

당시 정의와 도의를 숭상한 선비의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두 편의 ‘자정절명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 박세화 선생의 뜻과 학문 등을 계승하기 위한 의당학연구소는 2014년 설립됐다.

 

연구소는 독립운동가 묵향 전시,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의당 박세화 선생을 알리고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