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라고 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소위 ‘서유럽’부터 떠올린다. 그에 반해 동유럽은 서유럽에 뒤처진 ‘2등 유럽’으로 뒤따라온다. 동유럽이라는 단어는 전쟁, 혼란, 후진성 등으로 연결돼 동유럽 주민 스스로도 사용을 꺼리게 됐다.
동유럽은 20여개 나라가 복잡한 경계를 이루며 혼재한 지역이다. 나라의 숫자나 모호한 경계뿐만이 아니라 인종·언어·종교 등이 모두 복잡하게 뒤얽혔다. 역사적으로는 합스부르크제국·독일제국·러시아제국·오스만 제국에 속했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개신교·정교회·유대교·이슬람을 신봉했다. 작은 마을 안에서도 저 건너편에 다른 종교를 믿는 다른 민족의 이웃이 살았고,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서로를 용인하며 어우러져 살았다.
폴란드계 미국인인 저자는 이런 ‘다양성’이 곧 동유럽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책은 종교·민족·제국·전쟁·사상 등 14개 테마로 동유럽을 쉽게 풀어낸다. 핵심 주제를 기반으로 동유럽의 정체성을 다루는 한편 ‘폴란드 유대인’이라는 출신을 이용해 집안의 경험 등 개인적 경험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간다.
1부 ‘신앙’편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떻게 동유럽으로 흘러들어오게 됐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에서 쫓겨난 집단을 종교, 민족 등 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기독교·유대교·이슬람 신봉자들이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변화가 온 것은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다. 계몽주의 등의 영향으로 민족·종교마다 자신의 땅에서 고유 언어와 정체성을 갖고 독립적인 정치체를 일으키려는 민족주의가 득세한 것이다. 제국·다민족·민족주의가 얽히면서 이 지역의 ‘복잡한 분쟁’이 시작됐다.
20세기 들어서 낙후성과 2등 유럽이라는 현재의 인식이 자리 잡았다. 동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주의, 공산 통치의 오랜 암흑기를 지났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몰락과 프라하의 봄 등을 거쳐 끝내 ‘해빙’을 맞았다.
저자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은 하나의 유산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비극 속에서 희극을 보는 재능이다. 극단적으로 전개된 역사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경험은 우리에게 부조리에 대한 비상한 유창함을 부여해주었다. … 내가 보기에 갑작스러운 재앙, 예기치 않은 반전, 기적 같은 탈출이 가득한 이러한 비극-희극 이야기들은 동유럽의 진정한 공용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