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 통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독일에선 지난 5월24일부터 사흘간 ‘민주주의 축제’가 열렸다. 꼭 75년 전인 1949년 5월23일 독일(당시 서독) 기본법이 발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국·영국·프랑스 세 전승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주권국가가 되며 서독은 헌법(Constitution) 대신 그와 유사한 기본법(Basic Law)을 채택했다. 헌법이란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동·서독 분단의 고착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기본법 제정에 관여한 이들은 ‘기본법은 통일이 될 때까지의 과도기에만 효력이 있으며, 향후 통일이 되면 동독까지 포함한 전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제정된 헌법으로 대체한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실제로 기본법에는 동독과의 통일을 염두에 둔 듯한 조항이 있다. ‘독일의 다른 주(州)가 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면 그 주에도 기본법의 효력이 미친다’라고 규정한 기본법 제23조가 그것이다. 1989년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이 붕괴하며 동·서독 간의 통일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이때 기본법 23조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독에 속해 있던 5개주가 새롭게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이듬해인 1990년 통일이 완성된 것이다. 국내 대표적 독일 전문가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에서 기본법 23조를 “신(神)의 한 수”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했다.

 

독일은 통일 후에도 새로 헌법을 만들지 않았다. 옛 서독의 기본법이 그대로 남아 헌법 역할을 하고 있다. 기본법 자체가 워낙 정교하게 잘 설계되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법을 제정해 그것으로 바꿀 필요성을 못 느낀 결과다. 실은 동·서독의 신속한 통일을 가능케 한 기본법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 축제 첫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개막 연설에서 기본법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 정의가 공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토대”라고 평가했다. 정치인들이 허구한 날 개헌 타령만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광복절 이튿날인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8·15 독트린’에 관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남북 통일의 새 원칙에 해당하는 ‘8·15 독트린’을 발표했다. 통일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해야 하고 자유를 향한 북한 주민들의 열망을 독려하겠다고 한 점 때문인지 일각에선 ‘정부가 흡수통일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이에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점진적·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며 진화에 나섰다. 김 장관은 독일 통일 당시 동독의 5개주가 기본법 23조에 따라 서독에 가입한 것을 거론하며 “가입 통일”이란 표현을 썼다. 독일에서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통일과 법률에 관해선 독일이 우리의 모범이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