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비추다

‘2024 부산비엔날레’ 두 달간 대장정

‘어둠에서 보기’ 주제로 349점 전시
인니 농민 애환·동학정신 등 시각화
36개국 78명 작가들 직업 각양각색
이란·토고 등 다양한 문화권서 참여

인도네시아에서 쌀은 정치 자본으로 이용되어 왔다. 올해 총선은 결국 쌀 시장과 국가 쌀 재고량을 불안정하게 흔들어놓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농민들의 생계는 무시되곤 한다. 전시장 한편의 꽤 넓은 공간을 허수아비와 쌀포대, 걸개그림들이 차지하고 있다. 타링 파디의 ‘메매디 사와/허수아비’다. 인도네시아 총선 이후 폭등한 쌀값을 이슈로 다룬 작품이다.

타링 파디, ‘메매디 사와/ 허수아비’

이는 모래 채취 반대 시위와 국영 시멘트공장 건설 저지 등 농민저항에 연대해 벌인 작업이다. 인형, 현수막, 골판지, 목판화 등은 타링 파디의 주재료들이다. 타링 파디는 사회적 격변기였던 1998년 예술계 학생들과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로, 농민공동체와 함께 활동해오고 있다.

 

작가 김경화는 동학을 실패한 혁명이라거나 소수 종교 또는 과거에 멈춘 학문으로 여기지 않는다. 동학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소망했고, 온 우주의 생명들은 모두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작가는 동학의 ‘하늘님’을 우주에, 내 안에 있는 존재로, 만물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사상으로 파악한다.

 

그의 작품 ‘조율’에는 뭍 생명들이 서로 연결된 채 다투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각자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하늘님’을 깨워 창조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되찾으려는 동학 정신을 시각화했다. 다른 생명과의 연결을 추구하기보다 각자도생을 삶의 가치로 삼는 세태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김경화, ‘조율’

2024 부산비엔날레가 10월 20일까지 을숙도에 자리한 부산현대미술관과 원도심에 위치한 한성1918, 부산근현대역사관 금고미술관 그리고 초량의 주택을 개조한 전시장 초량재에서 펼쳐진다.

 

올해의 주제는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 ‘어둠’은 우리가 처한 곤경, 슬픈 역사, 알 수 없는 곳을 항해하는 두려움을 상징한다. 혼란 속에서 대안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는 의미다. 공동 전시감독 베라 메이와 필립 피로트는 해적들이 시도한 공동체 방식과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불교 도량의 깨달음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설명한다. 여러 문화와 배경의 사람들이 섞여서 소통하고 생활하는 모습이 부산과도 닮았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참여 작가 또한 다양한 문화권의 저술가, 교사, 악기 제작자, 의사, 디제이, 종교인 등 독특한 배경과 활동 영역을 가진 이들로 구성됐다. 총 36개국 78명 작가들의 작품 349점이 관람객과 만난다. 중동의 이란과 팔레스타인, 중미의 자메이카, 아프리카의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지역의 작가들이 다수 방문해, 다채로운 문화와 관점을 접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라즈야쉬리 구디, ‘지나친 겸손으로는 진정한 선을 이룰 수 없다’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소리를 크게 내었습니다/ 이 땅에서, 침묵하는 아이에겐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겸손으로는 진정한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도 작가 라즈야쉬리 구디의 ‘지나친 겸손으로는 진정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그릇을 뒤집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퍼포먼스 작품이다. 부처가 구걸그릇을 통해 자신의 스투파(승탑)를 만들어 보여준 일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부산에서 수집한 그릇들이 스투파로 변형된다. 이 행위는 달리트(불가촉천민) 공동체 내의 저항을 인정하는 의미를 가지며, 구걸그릇을 내려놓고 복종을 거부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신학철, ‘한국현대사-질곡의 종말’
신학철, ‘한국현대사-촛불혁명’

신학철의 ‘한국현대사-질곡의 종말’에는 얼굴 없는 수많은 민중의 죽음을 밟고 선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들이 보인다. 이들의 수직적 배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 또한 이미 희생되고 망실된 여럿의 개인이다. 일제강점기 양민학살부터 한국전쟁의 참상, 4·19, 민주화 항쟁,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민중희생사는 불길처럼, 신묘한 적란운처럼 치솟아 있다. 또 다른 작품 ‘한국현대사-촛불혁명’은 박근혜정부 퇴진운동을 다룬다.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 이미지다.

이두원, ‘여우와 벌레의 간교한 신경전’

이두원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 작가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조지아, 태국 등 전 세계를 방랑하며 그림을 그린다. ‘재료에는 귀천이 없다’고 여기는 작가는 현지에서 구한 양털, 삼베, 캐시미어, 마종이, 카펫의 뒷면 등에 자신이 보고 느낀 세계를 표현한다. “나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 영화처럼 이미지들이 떠오르면 그 장면을 즐기면서 시를 쓰듯 표현한다. 예술이론가들이 많은 현대미술 안에서 나는 그저 그림만 그리는 들개 같은 화가다.” 인간과 동물, 자연, 우주는 결국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특유의 해학적 코드가 더해져 웃음과 울림을 동시에 안겨준다.

골록흐 나피시, ‘이어지는 도시들’

여러 장의 직물과 수공예 작업으로 구성된 골록흐 나피시(이란)의 ‘이어지는 도시들’은 작가의 여행기다. 2017년부터 그가 여행하며 제작해 온 이 직물 콜라주는 시각예술 퍼포먼스, 전시, 민속축제나 음악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의 배경이 되었다. 2019년 네덜란드에서 첫 전시회를 가진 이후 같은 해 이탈리아와 파키스탄, 이란, 2022년 핀란드, 2023년에는 벨기에에서 연작 전체를 선보인 뒤, 올해 부산을 찾았다. 직물 작품은 지도와 달력 역할도 한다. 작가는 부산에서 구한 재료를 이용해 디자인, 설치, 퍼포먼스의 배경, 사운드와 음악 등을 작업하며 부산에서의 경험을 새로운 지도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