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열대 작물 면적 6년새 10배 쑥… 한반도 먹거리지도 급변 [심층기획-기후변화, 우리 삶을 바꾼다]

〈상〉 달라지는 일상

제주서만 재배되던 천혜향·레몬
충남까지 급속도로 재배지 북상
수온 상승에 한반도 어종도 변화

한은 “기후 따른 생산증가 0.6%P↓”
9호 태풍 종다리 20일 제주 상륙

멜론·무화과, 강원·경기도서 재배 가능
애플망고·용과도 경남·경북까지 올라가
쿨란트로·오크라 등 아열대 채소 산출

제주 해역 수온 올라 한치 어획량 급감
울릉도 인근 어종 59% 열대·아열대성
수중 생태계 피해 수산자원 직접 영향

#.1 퇴근 후 러닝을 즐기던 이모(37)씨는 최근 아찔한 경험을 했다. 동호인들과 강원 춘천시 공지천변을 뛰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지인들의 응급처치 덕분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건강에 자신이 있던 터라 충격이 작지 않았다. 이씨는 “습하고 무더운 날, 근육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더니 어느 순간 기억이 없었다”며 “러닝 동호회를 그만둔 뒤 실내 스포츠를 알아보고 있다”고 전했다.

 

#2. “사실상 아열대기후가 되면서 농산물뿐 아니라 수산물 소비도 변하고 있어요.” 경남 창원에서 생선구이 가게를 운영하는 한 업주는 하소연부터 늘어놨다. 예년에는 모둠생선구이를 주문하면 갈치, 고등어, 가자미 등을 섞어 손님상에 내줬는데, 최근 갈치보다 삼치를 내줄 때가 더 많아졌다는 얘기다. 인근 포구 어민들 상황도 비슷하다. 진해수협 김성진 삼포어촌계장은 “연근해에서 잡히는 어종이 예전과 다르다는 건 어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달아오른 한반도 19일 오후 세계 기상 정보를 표시하는 비주얼 맵 ‘어스널스쿨’로 확인한 한반도가 붉게 물들어 있다. 붉은색에서 노란색에 가까워질수록 ‘불쾌지수’가 높은, 견디기 힘든 날씨라는 뜻이다. 서울 지역에서 전날까지 29일 연속 열대야가 나타나는 등 전국적으로 무덥고 습한 날씨가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 어스널스쿨 캡처

자연재해를 넘어 ‘기후플레이션’으로 불리는 기후위기가 우리의 일상과 식탁을 바꿔 놓고 있다. 더 극심해진 찜통더위와 예측불허의 국지성 폭우까지 이어지며 봄과 가을이 사라진 ‘200일의 여름’이라는 말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제9호 태풍 ‘종다리’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이지만 무더위를 식히기는커녕 폭염과 열대야를 더 심화시킬 전망이다. 기상청은 남쪽의 뜨겁고 습한 공기를 끌어올려 찜통더위를 더 가중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기후 현상은 국내 산업생산을 상당 수준 하락시켰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한국은행이 19일 발표한 ‘이상기후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이상기후 충격은 발생 시점으로부터 약 12개월 후 산업생산 증가율을 0.6%포인트 떨어트렸다.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당장 농어업과 식물 군락지 등이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농가에서는 ‘강원 멜론·경기 무화과’라는 한반도 과일지도가 종종 언급된다. 제주나 전남 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던 멜론과 무화과가 이제는 강원과 경기에서 재배되는 등 열대 과일의 재배 지역이 점점 북상한다는 뜻이다. 제주도에서만 키우던 한라봉·천혜향은 이미 충남까지 재배지가 올라왔고, 애플망고와 용과 같은 열대과일은 이제 경남과 경북 지역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늘의 고장으로 알려진 경북 의성군에서도 아열대 과일 재배에 성공할 정도다.

 

사과 주산지였던 충남 예산과 공주·아산·서천 등의 아열대 과수 재배 농가도 70여곳이나 된다. 인근에선 쿨란트로·몰로키아·공심채·고수·오크라 등 이름이 생소한 아열대 채소도 산출된다.

 

충남농업기술원은 최근 전국 국공립학교 영양사 대상 하계직무연수에서 이처럼 국내에서 재배되는 아열대 채소와 조리법을 소개해 조만간 학생들의 급식상에 오를 전망이다. 겨울마다 뼈를 후비는 강추위로 ‘제베리아’(제천+시베리아)로 불리던 충북 제천에서는 지난해 12월 아열대 스마트농장이 문을 열었다. 이 농장에선 아열대 과일 23종과 화훼, 수목류 170여종 1200그루가 식재됐다.

쉼 없는 냉방기 가동 서울 낮 최고 온도가 34도로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19일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외벽에서 실외기들이 돌아가고 있다. 최상수 기자

이 같은 기후변화에 봉화·울진군의 금강소나무군락지도 위협받고 있다. 산림당국에 따르면 2022년 고사한 봉화·울진지역 금강소나무는 6025그루로 2020년 4934그루보다 1091그루(22.1%) 늘었다. 고사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겨울철 온난화와 폭설, 봄철 가뭄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어종의 변화도 감지된다. 제주에서는 급격히 올라간 수온 때문에 여름철 별미인 한치가 사라졌다. 6월부터 8월 사이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한치가 대목이었지만 올해는 좀처럼 잡히지 않으며 ‘금치’, ‘금징어’로 불리고 있다. 한치 최적 수온은 24도 정도이지만 본격적인 한치 조업 시기부터 수온이 크게 오르기 시작해 지금은 평년보다 2, 3도나 높은 30도에 육박해서다. 이 때문에 제주 명물 한치는 주로 남해안에서 잡히고 있고 제주 지역 생물 한치 위판량은 올해 반토막이 난 상황이다.

 

서해 최북단 인천 연평도에서 조업활동을 벌이는 한 주민은 올해 어획량은 늘었지만 상품성이 낮은 ‘물렁게’ 비중이 컸다고 설명했다. 물렁게는 껍데기가 단단하지 않아 제값을 못 받는 상품을 일컫는다. 배딱지를 눌러보면 푹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교해 위판장에서 팔리는 가격은 절반 수준에 그친다. 이 어민은 “많이 잡히는 것도 좋은데 제값을 받는 게 정해진 조업 기간·시간 동안에 훨씬 효율적이다”며 “소비자들도 저렴하다고 속이 텅 비고 맛없는 것을 고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과학수산원에 따르면 지난 55년간(1968~2022년) 우리나라 해역의 연평균 표층수온 상승률은 0.025도로 약 1.36도 상승하면서 지구 평균 표층수온 상승률의 2.5배에 달했다. 결국 어종 변화로 이어지면서 주요 어종의 서식지도 변화했다. 열대 어종은 소비자 선호도가 높지 않을뿐더러 상업적으로 활용할 만큼 다량으로 잡히지도 않는다. 한인성 수과원 기후변화과장은 “해양 온난화가 심화되면 단기적으로는 양식 생물의 피해 등이 발생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수중 생태계에 피해를 끼쳐 수산자원이 직접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후변화는 먹거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아열대 작물(채소·과수)의 우리나라 재배 면적은 4125.74㏊로 나타났다. 이는 2017년 354.2㏊에서 10배 넘게 넓어진 수치다. 우리나라 평균 기온이 올라가면서 제주가 주산지였던 한라봉은 물론 바나나·애플망고·백향과·용과·파인애플 등 아열대 과일도 이제는 내륙에서 재배할 수 있게 됐다. 사과는 2010년에만 해도 제주도와 영·호남 일부를 뺀 국토의 모든 지역에서 재배할 수 있었지만, 2050년에는 강원도 고산지역 등에서만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1970년대 동해에서 주로 잡히던 꽁치와 명태, 도루묵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명태는 1970년 연근해에서 1만3418t이 생산됐지만, 지난해에는 생산량 집계 자체가 불가능했다. 최근까지 동해안 대표 어종이었던 오징어의 어획량도 큰폭으로 줄고 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지난해 연근해 오징어 어획량은 2만3343t으로 전년 대비 36.4% 감소했다. 반면 파랑돔과 연무자리돔 등 연근해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어종은 급격히 늘었다. 경북 울릉도 연안에서 발견한 131개 어종 가운데 열대·아열대성 어류가 58.5%에 달했다고 국립생물자원관은 밝혔다.

 

기후변화는 밥상 물가 외에 휴가를 즐기는 방식도 바꿔 놨다. 경남 양산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엄모(39)씨는 해외로 떠나는 올해 여름 휴가를 8월 말로 훌쩍 미뤘다. 매년 환자 방문이 뜸한 7월 말이나 8월 초에 휴가를 다녀왔지만 폭염 탓에 상황이 달라졌다. 엄씨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 오는 어르신들이 꽤 늘었다”며 “세계 어디를 가도 덥기에 폭염이 꺾인 뒤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전했다.

 

강원 동해안 일부 해수욕장은 이달 초까지만 문을 열던 예년과 달리 이달 말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