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블루·레드·화이트’ ‘비긴 어게인’… 극장가에 과거 명작 몰려온다

1980·90년대 명작부터 지난해 개봉했던 따끈한 신작까지 극장가에 재개봉 영화가 밀려오고 있다. 예술영화와 동의어였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화이트·레드’,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이 연이어 관객과 만난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비포 시리즈’는 지난달부터 극장에 다시 걸렸다. 비교적 최근 개봉작인 ‘러빙 빈센트’와 ‘애프터썬’도 다시 스크린 나들이를 한다. 과거 명작들은 인지도가 높아 최근 침체된 영화시장에서 기본 경쟁력을 가지는 데다 관객 수요도 꾸준하다보니, 극장가에서 재개봉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희생’부터 ‘레드·블루·화이트’까지

 

‘영상 시인’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은 21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개봉한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장 뤽 고다르 감독), “그의 특이한 감수성은 압도적이면서도 놀랍다”(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의 찬사를 받은 거장이다. 

 

‘희생’은 1986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국내에서 예술영화 흥행 신드롬을 이끈 상징적 작품이기도 하다. 1995년 국내 개봉 당시 약 11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을 수입·배급하는 엣나인필름 측은 “개봉 당일 종로의 코아아트홀은 이른 아침부터 ‘희생’을 보기 위한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90년대 대표적 유럽 영화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도 내달 4K 리마스터링으로 개봉한다.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한 ‘세 가지 색: 블루’가 내달 4일, ‘비포 시리즈’의 줄리 델피가 나오는 ‘세 가지 색: 화이트’가 내달 11일 차례로 극장 나들이를 한다. 내달 18일에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이렌느 야곱이 주연한 ‘세 가지 색: 레드’가 상영된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1990년대 유럽 통합을 기념해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기획됐다.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은 국내 개봉 10주년을 기념해 내달 18일 재개봉한다. 대만 뉴웨이브 거장 에드워드 양의 ‘독립시대’도 제작 30년만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내달 개봉한다. 10월에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1988년 선보인 ‘마지막 황제’가 4K 리마스터링으로 관객을 찾는다.

 

앞서 지난달에는 ‘비포 시리즈’ 첫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가 상영됐고, 지난 14일부터는 ‘비포 선셋’이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4K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상영됐다. 내달 4일에는 ‘비포 미드나잇’이 공개된다.

 

비교적 최근작인 ‘러빙 빈센트’는 내달 4일 스크린으로 돌아온다. 2017년 개봉한 이 작품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1년 후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화가 107명이 직접 그린 유화 약 6만2500점이 등장한다.

 

지난해 개봉작인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도 28일 재개봉한다. 이 작품은 20여년 전 아빠와 보낸 튀르키예 여행이 담긴 캠코더를 보며 그 해 여름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배급사 측은 “영화의 배경이 늦여름 휴가여서 관객들로부터 이 작품을 다시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해 재개봉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메가박스는 올해 4월부터 ‘메가-당원영’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명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레옹’ ‘8월의 크리스마스’ ‘쇼생크 탈출’ 등을 재개봉했다. 

 

◆어려운 시장에 자구책… 관객 수요도

 

명작의 귀환은 어려운 시장 환경과 관객 수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메가박스 관계자는 “요즘에는 온라인 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에서 옛 명작들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차별점은 분명하다”며 “좋은 작품을 영화관에서 관람하고 싶어하는 관객 니즈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재개봉작은 여러 연령대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올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10·20대 관객에게는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명작을 영화관에서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한다”고 전했다. 실제 메가박스가 올해 5월 재개봉한 ‘쇼생크탈출’은 4만5000명이 넘는 관객을 기록했다.

 

‘희생’을 재개봉하는 엣나인필름 주희 기획마케팅이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나 ‘퍼펙트 데이즈’가 쉬운 영화가 아닌데 최근 10만, 20만명의 관객이 들었다”며 “영혼을 흔드는 영화를 원하는 관객, 좋은 작품을 받아들일 관객이 여전히 존재한다 생각해 ‘희생’ 같은 작품을 극장에 걸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포 시리즈’를 재개봉하는 에무필름즈 김상민 대표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접촉 그리고 사랑이 궁핍한 시대에 로맨스 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비포 시리즈’는 관객의 마음에 단비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며 “지난해 에무시네마에서 최초 단독 개봉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2024년 정식 와이드 개봉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어려워진 시장환경은 배급사와 극장들이 재개봉작에 주목하게 만든 요인이다. 한 중견 수입배급사 관계자는 “최근 예술영화계는 잘 되는 작품만 잘 될뿐 전반적으로 정말 어렵다”며 “그러다보니 영화사들이 재개봉 등 여러 시도를 통해 매출을 늘려보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작을 재개봉할 경우 인지도를 쌓기 위한 품이 덜 드는 것이 장점이다. 영화관 입장에서는 최근 시장 침체로 작품성·상업성을 갖춘 신작이 줄어들다보니 과거 작품에 눈을 돌리고 있다. 각 멀티플렉스들이 영화관의 정체성을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바꾸는 흐름도 재개봉작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아직 ‘재개봉 성공 공식’이 모호한 것은 풀어야할 과제다. 과거 흥행작이라해서 무조건 재개봉 성적이 좋은 건 아니다. 영화사들은 ‘언제 틀든 관객이 보러 오는 작품’을 찾기 위해 여전히 고심하고 있다.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의 경우 판권을 가진 회사가 바뀐 경우가 많아 판권자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다. 주희 이사는 “‘희생’의 판권자에 대해 해외 유명 세일즈사에 다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더라”라며 “다행히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희생’을 4K로 상영해서 판권자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