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충희 지사의 딸입니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구한말인 1897년 고종 임금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동시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때까지 존재하던 조선군도 대한제국군으로 개편됐다. 군주제 국가답게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군의 총사령관이자 대원수였다. 그 밑에 장성급으로 대장(大將)·부장(副將)·참장(參將)이, 영관급 장교로 정령(正領)·부령(副領)·참령(參領)이, 위관급 장교로 정위(正尉)·부위(副尉)·참위(參尉)가 각각 있었다.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방·외교 분야 주권을 강탈한 이후인 1907년 대한제국군은 강제로 해산당하고 만다. 독립운동가 홍충희(1878∼1946) 지사가 그때 대한제국군 부위였으니 오늘날로 치면 육군 중위에 해당하는 셈이다.

독립운동가 홍충희 지사의 막내딸 홍기옥 할머니가 지난 1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자서전 ‘나는 홍충희 지사의 딸입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더 나아가 나라까지 망했으니 홍 지사가 얼마나 비분강개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1919년 일어난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한반도를 떠나 중국 만주 북간도로 건너갔다.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오늘날의 지린성(省) 왕칭현(縣)에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했다. 이는 훗날 북로군정서로 이름이 바뀌어 만주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힙을 합쳐 일본군을 격파한 쾌거였다. 약 6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해 1200명가량의 장병이 사살됐다. 지금까지도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홍 지사는 청산리 전투 당시 대대장 서리 겸 제2중대장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고 정규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도 있는 홍 지사는 당시 독립군 부대의 중요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홍 지사는 소련(현 러시아) 연해주 등에서 계속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다만 아쉽게도 국가보훈부는 “청산리 전투 이후 홍 지사의 활동 내용이 담긴 기록은 현재로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1977년 홍 지사가 청산리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을 근거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19일 68세를 일기로 별세한 홍 지사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돼 있다.

독립운동가 홍충희 지사의 막내딸 홍기옥 할머니가 펴낸 자서전 ‘나는 홍충희 지사의 딸입니다’ 표지. 홍 지사는 1920년 청산리 전투 당시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대대장 서리 겸 제2중대장을 맡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1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가 개최됐다. 홍 지사의 막내딸 홍기옥(90) 할머니가 선친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 11점을 전쟁기념사업회에 기증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며 가족들이 가난과 일제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증식 후에는 홍 할머니의 자서전 ‘나는 홍충희 지사의 딸입니다’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올바른 역사 전파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의 다짐처럼 이 귀중한 사료들이 기념관에 전시돼 순국선열의 희생을 널리 알리길 바란다. 아울러 홍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의료지원국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가 운영한 스칸디나비아 병원(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의료지원 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니 참으로 부전여전(父傳女傳)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