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남화숙/남관숙 옮김/후마니타스/2만원
늦봄 어느 이른 아침, 대동강 기슭 모란봉 가장자리에 자리한 을밀대 밑을 지나던 평양 시민들은 누각 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열변을 토하는 한 여성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쪽을 진 것으로 보이는 전통적 머리에,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한 그의 이름은 강주룡. 평원고무에서 일하는 여직공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몇 시간 전 광목천 한쪽 끝에 돌을 묶어 지붕 위로 던져 올린 뒤 그걸 잡고 을밀대로 올라갔다. 평양 경찰은 그를 을밀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경관 40여명을 출동시키고 소방대를 불렀다. 강주룡은 지붕에 사다리를 대면 바로 뛰어내려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평원고무 파업이 자신의 공장 일에 그치지 않고 평양 고무 노동자 전체의 운명을 판가름할 싸움이라고 설명한 뒤 군중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삭감)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1931년 5월29일, 을밀대 위의 강주룡은 평양 시민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사연은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체공녀 돌현!” 다음날 일간지 ‘동아일보’는 고무 노동자 파업을 알렸고, 이틀 뒤에는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앉은 강주룡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는 강주룡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팔짱을 낀 모습에선 어떤 결연함이 느껴진다. 신문들은 앞다퉈 강주룡을 “옥상녀” “을밀대의 여인” “여투사”라고 불렀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공, 여성 산업노동자를 주목한다. 먼저 일제 강점기 강주룡을 비롯해 고무신을 생산하는 평양의 고무 신발 산업에 초점을 맞춰 식민통치 하 근대적 주체의 등장을 조명한 저자는, 이어서 1951년과 이듬해 전시 수도였던 부산을 달궜던 조선방직(조방) 파업을 살핀다.
결국 과거 전평운동을 비롯해 수십 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기반 위에 조방 여성 노동자들의 쟁의는 이듬해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의 공포로 이어졌고 노조는 노사관계에서 기업 측의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받게 됐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아울러 조방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조원들로부터도 ‘여동지’로 존중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
저자는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모태로 한 ‘여성 해방노동자 기수회’ 운동과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주길자의 분투를 비롯해 1970~80년대 초 서울과 수도권에서 활발했던 여성 주도의 민주 노동조합 운동도 조명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과 가족 생활임금 담론의 제도화가 어떻게 여성 노동자들의 비가시성을 지속시켰는지 주목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시기 이처럼 죽음을 택한 신발 대기업 ‘대봉’의 숙련 미싱사이자 노조 활동가 권미경의 투쟁과 국제상사를 비롯한 부산 신발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민주노조 운동 지도부가 여성 노동자에서 남성 노동자로 교체되고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서 밀려나 주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는 이와 관련,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함께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변화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21세기 신자유주의하에서 해결되지 못한 노동과 여성 문제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여성 용접공 김진숙씨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김진숙은 한진조선소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서 2011년 1월6일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조선소 크레인 위에 올라간 뒤 309일간 고공 농성을 감행했다. 그의 장기 고공 농성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고, 회사는 결국 정리해고 계획을 철회했다.
요컨대, 책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두 어려운 과제를 성취한 한국의 성공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분투가 자리하고 있음을 규명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 격인 이철순이 여성 노동운동가 8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에서 외친 목소리를 거대한 메아리로 만든다.
“엄혹했던 시절 이름도 빛도 없이 노동운동을 일구어 온 그대들. 그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87년 대투쟁이 있었을까, 이땅의 민주화가 이만큼이라도 가능했을까, 오늘날의 민주노조 운동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