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의 기형적인 위원장과 부위원장 ‘2인 체제’ 운영이 법원 판결로 도마 위에 올랐다. 본안 소송이 남아 있지만 이진숙 방통위원장의 탄핵 소추까지 무릅쓰고 밀어붙인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진 교체 작업이 또다시 법원 암초에 부딪치게 됐다. 방통위가 야권 우위 방문진 구도를 깨트리고 MBC 안형준 사장도 해임한다는 구상에 큰 차질이 생긴 셈이다.
방통위는 지난해 8월 김효재 위원장 직무대행 때부터 공영방송, 그중에서도 MBC 대주주인 방문진 구조 재편을 시도해 왔다. 야권 인사인 방문진 권태선 이사장과 김기중 이사 해임을 꾸준히 추진했으나 법원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결국 이사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야권 우위 구도가 유지됐다. 이동관·김홍일 전 방통위원장 체제에서는 야당이 탄핵소추안 카드로 압박하고 위원장 사퇴가 반복되면서 방문진 구조 재편에 실패했다.
그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새로 임명한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현 위원장 직무대행)이 작심하고 나섰다. 임명 10시간 만에 방문진 새 이사로 김동률 서강대 교수, 손정미 TV조선 시청자위원회 위원 등 여권 성향 인사 6명을 전격 선임한 것이다. 야권 반발과 ‘2인 체제’ 의결의 정당성 논란 등을 정면 돌파한 결정이다.
하지만 법원이 26일 방문진의 새 이사가 임명될 경우 권 이사장을 비롯한 현 이사진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는다고 판단하면서 새 이사 임명이 보류됐다. 방문진은 자연스레 야권 우위 구도가 유지됐다. 지난 12일 임기(3년)가 종료된 현 이사진은 신임 이사 임명 집행정지 본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자동으로 임기가 연장된다. MBC 안 사장도 한숨을 돌리게 됐다.
법원 결정을 환영한 권 이사장은 서울 마포구 방문진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이 2인 체제 방통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방통위법이 기본적·원칙적으로 정치적 다양성을 반영한 5인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된 회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결정이 대통령과 국회가 함께 방통위를 본연의 합의제 기구로 되돌리기 위한 대화에 나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8월 김 직무대행과 김현 위원이 임기 만료로 퇴임한 뒤 여야 대치로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장과 부위원장 ‘2인 체제’로 유지된 방통위는 비상이다. 2인 체제가 의결 정족수를 충족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이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앞서 2인 체제로 의결한 주요 안건도 시비 논란이 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 시절 2인 체제에서 의결된 YTN 민영화가 대표적이다. 탄핵소추안 표결 처리를 앞두고 자진사퇴한 이 전 위원장의 바통을 넘겨받은 김 전 위원장은 지난 2월 7일 ‘YTN 최다출자자 변경 승인’을 의결해 YTN을 유진그룹에 안겨줬다. 당시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와 YTN 우리사주조합은 서울행정법원에 최대출자자 변경 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위원장이 직무정지 전 의결한 KBS 신임 이사 추천 안건의 귀추도 주목된다. 이 위원장과 김 부위원장은 지난달 31일 방문진 신임 이사 임명과 함께 KBS 이사 11명 중 7명 후보를 추천했다. KBS 이사의 임기는 31일까지로, 법원이 같은 체제하에 임명했던 방문진 이사 임명에 제동을 건 만큼 KBS 신임 이사 추천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관계자는 “이번 법원 결정에 따라 같은 2인 체제에서 의결된 KBS 이사 추천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KBS 이사들이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다만 방문진 임명은 방통위가 하지만 KBS는 방통위가 후보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어서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방통위로선 가뜩이나 ‘식물 기관’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김 부위원장만 남은 1인 체제라 어떤 심의, 의결도 할 수 없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EBS 이사 임명과 MBC를 비롯한 일부 지상파와 라디오 방송 재허가 여부를 연말까지 결론내야 하는 등 현안이 적지 않다.
김 부위원장은 이날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현재 방통위는 방송과 통신을 둘러싼 풀어야 할 여러 현안이 산적한데 기관장 부재와 함께 위원회 개최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며 “방송통신시장 실태점검과 사실조사 등 위원회 심의·의결 없이도 추진할 수 있는 과제들을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