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변덕에 진땀 흘리는 유럽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19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는 나토 회원국들 가운데 영국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그리스 라트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8개국 정상만 따로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이들은 미국과 더불어 국방비로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백악관은 이 모임에 ‘2% 국가들 오찬’이란 다소 어색한 이름을 붙였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유럽 주요국이자 나토에서도 비중이 큰 나라들이지만, 방위비 지출이 GDP 대비 2%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초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의 동맹들이 나토에 더 큰 기여를 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생각이 얼마나 확고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18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이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를 누르고 당선됐다. 바이든은 이듬해 1월 대통령에 취임하며 동맹국들을 향해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쳤다. 임기 내내 동맹을 경시하고 ‘미국 우선주의’로 일관한 트럼프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다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란 뜻으로 풀이됐다. 그런데 트럼프의 ‘2% 기준’은 바이든 행정부도 그대로 수용했다. 미국은 나토 사무총장 옌스 스톨텐베르그를 앞세워 국방비가 GDP의 2%에 못 미치는 동맹국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물론 트럼프처럼 거친 방식을 동원하진 않았다. 지난 7월 미국이 주최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바이든은 회원국 중 23개국이 방위비로 GDP의 2% 이상을 지출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자신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았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나토에 관한 트럼프의 발언 수위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 지난 2월 유세 도중에 한 말이 시발점이었다. 그는 “나토 회원국들이 방위비를 충분히 부담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공격해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러시아의 공격을) 부추기겠다“고 덧붙였다. 며칠 뒤에는 “내가 백악관에 복귀하면 방위비 지출 목표를 충족하지 못한 나토 회원국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또다시 엄포를 놓았다. 나토 회원국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럽 국가들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돈을 안 내면 러시아에 제물로 바치겠다니, 이것이 미국 대통령이 할 소리인가.’ ‘지금처럼 미국만 믿고 있다가는 큰일나겠다. 당장 자주국방에 나서야 한다.’ 유럽 대륙에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다.

 

2017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나토 정상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서 나란히 착석하고 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EPA연합뉴스

한때 그토록 2%에 집착했던 트럼프가 다시 말을 바꿨다. 아니,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고 해야 할까. 트럼프는 26일 미시간주(州) 디트로이트에서 현역 및 예비역 군인들을 상대로 연설하던 도중 “2%는 세기의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나토 회원국이 적어도 3%를 지출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외쳤다. 2019년만 해도 2%라는 수치를 무슨 신줏단지처럼 떠받들더니 이제 웬만한 나라는 달성하기 힘든 높은 기준을 들이민 것이다. 현재 나토 회원국 가운데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3% 이상인 나라는 미국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스 5개국뿐이다. 당장 스페인(1.28%) 룩셈부르크(1.29%) 벨기에(1.30%) 캐나다(1.37%) 같은 나라들은 2% 돌파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3%라니! 유럽 국가 정부들이 트럼프 말고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지지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