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의감성엽서] 고맙고 예쁜 친구들

오늘은 8월의 마지막 날. 달력상으로는 여름의 끝날이다. 자연의 원리는 언제나 정직하여 9월이 오면 틀림없이 이 지독했던 폭염과 열대야도 한풀 꺾일 것이니 기쁘다. 나는 아침부터 집안 여기저기를 대강 청소하고는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12시 정각, 왕십리역 9번 출구에서. 코로나 이후 왕십리 쪽 나들이는 처음인지라 무척 설레고 들뜬 마음에 김소월의 시 ‘왕십리’를 입속으로 외우며 전철역으로 향한다.

“비가 온다/오누나/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웬걸, 저 새야/울려거든/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운율이 살아 있어 언제 읽어도 좋은 김소월의 시. 그는 백석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평북 정주. 나는 이 두 시인이 내 곁에 있어 정말 좋다. 아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모든 옛 시인들이 다 좋다. 그들 때문에 나는 늘 아름답고 슬픈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시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몰라보게 다듬어진 왕십리, 그 한가운데서 친구들을 만나니 반갑고 예뻐서 모든 것이 좋아, 좋아로 변한다. 날씨도, 함께 먹는 점심도, 행당동 골목길도, 골목길 중간쯤 들어선 카페도, 오늘 오후 우리가 다 함께 볼 연극 ‘맹진사댁 경사’에 출연하는 한 친구를 축하해줄 노란 국화 화분도.

우리는 넓고 쾌적한 카페에 앉아 그동안 호주머니에 꾹꾹 눌러 놓았던 수다를 하나하나 꺼내놓으며 모처럼 만에 이야기 폭죽을 터트리는 재미를 누리며 웃고, 또 웃는다. 그러다 결국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독서 스터디, ‘시作의 풍경’팀답게 책 이야기로 넘어와, 이번 9월부터는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지난 100년간 발표된 한국 단편소설 중 101편을 선정하고 해설을 붙인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을 읽는 게 어떨까? 그러면 시대별 한국문학작품을 되짚어보는 계기도 되고, 중요 작품을 다시 읽는 기쁨도 누릴 수 있고,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우리 청춘도 만날 수 있을 테니 꽤 재밌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는 등등의 의견이 오가고, 다시 이어지는 수다….

시를 사랑하고, 책 읽는 즐거움으로 똘똘 뭉친 사이라 함께 읽은 책을 나누고 공부하는 사이, 마법과도 같은 책이 우리 우정에도 작용했는지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버린, 그 우정이 주는 정서적 미덕만큼 다정하고, 자유롭고, 소박한 친구들. 나는 이 친구들이 있어 정말 좋다. 고맙고 예쁘다.


김상미 시인